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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e Jun 24. 2023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다름의 인정에 대하여

우리 가족은 6명이었다. 돌아가신 엄마, 아빠 그리고 두 살이 많은 언니, 한 살 어린 여동생, 여섯 살 어린 남동생. 지금도 우린 모이면 수다가 많다. 어린 시절 아빠는 저녁을 먹고 나면 학교에서 내어 준 그날의 숙제를 검사하신 후 연탄불로 따듯해진 그 좁은 안방 이불속에 다리를 넣고 뺑 둘러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을 각자 이야기하는 시간을 주셨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솝우화나 탈무드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시곤 했었다. 그 시간쯤이면 엄마는 여름엔 집에서 기른 가지전이나 호박부침개, 감자전 또는 과일을 내오셨고, 겨울엔 땅에 묻어 두었던 항아리 속 꽁꽁 언 동치미와 양은 냄비에 들기름을 넣은 김치볶음밥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배고팠던 시절 이야기다.

올해도 활짝 핀 집앞학교 입구에 핀 접시꽃.

언니는 늘 차분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 이 지역에선 지금의 말로 넘사벽이었기에 누구도 쉽게 말을 붙이기 힘든 예쁜 얼굴과 목소리에 귀티? 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언니는 음악시간 노래하는 것 빼고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공부와 글쓰기, 그림 그리기는 당연하고 체육 쪽으로도 모든 상을 휩쓸 만큼 말이다.  나의 언니는 지금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 초등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 받은 사탕 한 알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 와 망치로 깨 동생들 입에 나누어 넣어 주던 맘 착하고 속 깊은 나의 언니. 그런 언니와 나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었다. 어린 맘에 부모님께 늘 칭찬 듣는 언니가 부러워 괜한 심술을 부렸던 것 같다. 언니가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후 우린 동생이자 친구 같은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의 여동생은 키도 몸집도 작다. 그러나 강하다. 거기다 이쁘다. 주먹만 한 얼굴에 눈코입이 들어 있는 게 신기할 때도 있다. 한지민과 고소영을 섞은 것보다 이쁘다면 이해가 쉬울 듯싶다. 누구에게도 지는 것을 싫어해 모든 것에 최선을 다 하는 성격을 지녔다. 피아노, 서예, 무용, 달리기 거기에 공부까지 늘 잘했다. 고등학교 땐 선생님을 대신해 수학의 정석을 대신 강의 할 만큼 말이다. 그리고 영민하며 예리하고 통찰력을 갖고 있다. 26살에 한국을 떠나 지금껏 해외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뜻하지 않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들을 혼자 공부하면서 처리할 만큼 영어 실력 또한 출중하다. 언니는 말이 거의 없었지만 동생은 언어의 마술사처럼 말을 참 잘한다. 때론 그 많은 말을 듣는 것이 피곤하지만 그래도 동생과 나는 비밀이 거의 없이 지낸다. 7년 만에 한국에 왔던 동생은 드디어 흙으로 돌아간 엄마를 만났고 오늘 캐나다로 떠난다.

감자 걷다보면 자작나무 숲이 보인다.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신성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나무를 바라보는 일은 유일하게 내가 하는 일들 중 하나이다.

막내 남동생도 시골아이 같지 않게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남동생은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특히 나에겐 더 그랬었다. 6살 나이인 내가 어린 동생을 매일 업고 다녔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가끔 동생을 업고 등교하기도 했다. 그땐 그랬다. 영화 내 마음속 풍금처럼 그런 시골은 아니었지만 수업 내내 조용히 앉아 나를 기다릴 만큼 어린 나이에도 차분하고 참을성이 많으며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않던 동생은 지금도 도덕적?이다. 아주 매우 그렇다. 그리고 착하다. 아픈 내가 연락할 때마다 모든 일을 뒤로하고 늘 내 곁을 찾아 주었다. 엄마가 아프실 때도 단 한 번의 짜증이나 힘듦을 내색하지 않던 남동생 또한 고등학교땐 전교회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손재주가 뛰어나 전공 또한 그렇고 지금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엄마를 닮은 것 같다. 그리고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고 있다. 외아들이었기에 결혼하여 후손을 기대하셨을 수도 있었지만 나의 부모님은 동생의 삶을 인정하셨다. 아빠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너의 인생이니 알아서 하여라. 그리고 후에 내가 엄마 곁으로 떠나 외롭거든 누나들과 더 가까이 지내도록해"라고 말이다. 나 또한 가끔 아이들에게 말한다. "만약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 삼촌은 혼자 있잖아. 너희들이 삼촌 외롭지 않게 자주 연락하고 그렇게 지내야 해" 나의 아이들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제 운돔하고 돌아오는 길에 핀 접시꽃. 같은 접시꽃도 색이 다 다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못했다. 집에서 나가면 쓸데없는 호기심을 꼭 확인하느라 늘 사고를 쳐 혼나기도 많이 했었다. 다른 가족들은 친구도 있었지만 난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나의 첫 친구는 초등 5학년인가 그때쯤 생긴 걸로 기억한다. 동네 중국집 딸이었던 친구. 난 덜렁대고 목소리도 집안에서 가장 컸으며, 가족과 달리 까만 피부를 갖고 있었다. 둘째 이모부는 늘 감자떡이고 부르셨었다. 감자떡처럼 까맣다는 뜻이었다. 반짝이던 동그란 눈으로 내 의사는 꼭 말하고 밝혀야 했던 어린 시절엔 늘 외로웠다. 언니와 여동생은 둘이 붙어 있었고 남동생은 막내라서 모든 사랑을 받아서인지 혼자였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 엄마의 소원?을 이루어낸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였다. 엄마의 시점으로 보았을 때 명문이라고 일컫는 여자대학 즉 E나 S여자대학을 졸업 후 글 쓰는 일을 하는 딸이 있기를 꿈꿨었다고 후에 말씀을 하셨다. 다른 자식들은 일반대학을 다녔지만 어린 시절 그 털털대는 성격의 내가 여자대학원을 졸업한 후 글을 쓰고 그림을 분석하며 화가들과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에 매우 놀라신 듯 보였다. 전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엄마는 나를 많이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매일 등짝 스매싱을 맞던 내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어렸을 때 외롭지 않게 조금만 더 나의 말을 들어주지 그랬어 엄마! 하긴 늘 부족한 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나 같아도 그랬을 듯싶어.

 이 길을 감자와 매일 걷는다.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걷고 들어와 땀범벅인 몸을 씻어 내면 나의 몸과 맘은 한결 가벼워진다.

저녁 이부자리 속에서 각자 이야기하다 내 차례가 돌아오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낮엔 엄마 모르게 나무 찬장 속 날계란을 다 깨뜨린 일이나 엄마가 기껏 만들어 놓은 식혜에 깨소금을 잔뜩 넣었던 범인이 나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며, 기껏 사 주신 새 옷을 입고 나가 엉덩이 부분이 다 해지도록 혼자 돌미끄럼을 탔었다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학 때면 개학 이틀 전부터 일기는 언니 것을 베껴 쓰고, 그림과제나 만들기는 그 전년도에 언니나 동생의 것에 이름만 바꿔 낼 정도로 나는 가족들에겐 걱정거리였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그냥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엄마와 아빠는 그런 일들로 야단을 치신 적이 거의 없으셨다. 그렇게 대화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서인지 다른 가족과 달리 우리들은 모이면 술과 화투놀이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아니할 줄을 모른다.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유일하게 하는 것은 집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지금도 모이면 낄낄 깔깔대며 어린 시절과 각자의 아이들 얘기를 한다. 다만 연로해지신 아빠의 청력이 예전 같지 않아 보청기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잘 듣지 못하시기 때문에 큰 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서 5분 정도 대화를 하고 나면 모두 진이 빠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좋다. 아빠가 혼자 잘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영월엄씨 시조가 심은 은행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엄마와 아빠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들 넷이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린 그것을 이해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얼마 전 나와 언니 사이에 커다란 의견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나의 인생 중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기에 난 나의 신념을 가졌고 언니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언니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그렇게 우린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서로에게 연락이 없었다. 아니 영원히 언니가 나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던 언니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언니의 집에 잠깐 들러 얼굴을 보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 "언니! 늘 못난 동생에게 먼저 연락 줘 너무 고마워!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선택이 되도록 노력할게." "그래 그것이 어떤 결론이든 넌 내 동생이잖아. 영원한 내 동생!" "고마워 언니 그리고 나 요즘 많이 편안해졌어! 약도 이번 달엔 3알이나 줄었어 감사하게도" "그리됐다니 정말 잘 된 일이네" 운전 중(블루투스이용) 잠깐의 통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인생에 있어 커다란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들을 보내고 있기에 언니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왔었다.

언제보아도 이쁜 나의 감자. 천의 표정을 가졌다는 누군가의 말이 맞는 듯 하다. 산책이나 운동을 나오면 일단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자주 느낀다. 어제도 쎄~~하며 웃고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란 얼마나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존재끼리도 한순간에 사소한 일로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름을 인정할 깊이와 이해 그리고 용기가 있다면 세상의 각 존재들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이유가 있다. ' ~~ 때문에!' 그 '때문에'라는 것은 나를 그리고 개인의 특성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회가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주어진 기회조차 거부해 버리는 결과를 자아낸다. 나는 ~~ 때문에 못한다는 것보다 ~~ 때문에 무엇을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때론 의식의 흐름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일들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후회 없이 매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 또한 다름에 대해 인정하는 행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려 한다. 나의 개성을 존중받기 위해서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다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문화론에도 문화상대주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것을 인지할 때 우리는 인정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가족, 부부 또는 연인, 친구, 지인이라는 통념에 뿌리를 두고 우리라는 전체적 개념으로 상대의 감정이나 개성을 무시하거나 지나쳐 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가족과 연인 부부와 같은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각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시간 속에서 에너지를 보충한다면 그 힘으로 전체적 개념인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다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하여야 하는 일들을 각기 수행하면서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보듬고 다듬어 간다면 더 멋지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가족들은 각자의 개성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각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것을 받아들여 성찰의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어린 시절 아빠의 훈육 방법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에 경청한 후 세밀하게 감정의 선을 따라 이해한 후 충고와 질책 그리고 따듯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각자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이 나이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신 아빠께 감사함을 전한다.



https://youtube.com/watch?v=2dliFUHv-Ls&feature=share

마암초등학생의 시에 시인이자 노래하는 백창우가 곡을 붙인 노래. 꽃은 참 예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로 아름답다. 나의 아이들이 매일 따라 부르던 노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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