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eline Sep 14. 2023

오해에 대한 단상

나는 정상인이었습니다.

지난달 약을 받기 위해 주치의를 만났었다. 7월 중순부터 신체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해리현상! 단기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잠들기 전 있었던 일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기억나질 않았다. 그 원인이 7월 하노이 여행 후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현재 복용하고 있는 약물의 부작용인지에 대해 질문하자 주치의는 현재 나의 상태는 매우 정상적인 상태이며, 과도하고 극단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단기 해리현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셨다. 또한 나는 경계성성격장애가 아니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전에도 의심은 들었었다. 경계성성격장애의 주된 증상은 관계에 있어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집착을 넘어서 병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주로 자해나 큰 사건을 만들어 목적을 달성하려는 신체 표현들! 평소의 감정은 롤러코스터와 같지도 않으며, 관계에 있어 최대한 상대를 이해하려 하지만 끝내 도리나 상식을 벗어나는 이에게 있어서는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말씀을 이어가셨다. 지금 00 씨는 그냥 3종세트예요. 트라우마로 인한 우울증, 공황장애, 불안증 그것도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으니 정신과적인 면에 있어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약 또한 줄여 주셨다.

까마귀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아름답다.

정신과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내려졌던 진단명을 나와 나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진단으로 인해 늘 가족들에게 조차 의심을 받고, 때론 행동이나 판단에 있어 통제를 받아 자유롭게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나름의 고통이 있었다. 이제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이라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난 십 년 동안 정신질환 중 가장 고치기 힘들다는 경계성성격장애라고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억제, 통제하며 나의 감정에 늘 집중하여야만 했었다. 누군가에게 실수 또는 상처와 피해가 되지 않도록 한 마디의 말과 표정까지 살피며 사람들과 접촉했었다. 그것은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만드는 결과까지 만들고만 원인이었었다.(그러나 나의 기질과 성격은 외부와의 접촉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며칠 전 고등학교 후배가 집을 찾아오며 가을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의 오해로 인해 약 먹는 사람이라는 아픈 말을 들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된 듯 한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었다. 나는 존재가치가 없구나 또는 태어나 겨우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이분법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결론짓는 행위이다. 이것은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으로 답을 구하기 때문이다. 정신상담전문교수의 한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정의 전이가 결여되어 있으며, 심하게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멀리까지 바라보는 시안을 갖질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뭐 그렇게까지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머리가 나쁘다니?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실제 세상살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은 차라리 그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다.) 승부를 위한 스포츠가 아니기에 결과를 낳은 과정을 따라가 입체적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면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자아의 성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분법적인 잣대로 상대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단정 짓는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을 떠올리며 사람은 본만큼 알며, 알고 있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삼 와닿는다.


친구와 산책중! 친구는 헤어질 때 나의 등 뒤로 셀린 오늘 내게 행복을 주어 넘 고마웠어~~♡  헤헤~ 나도 그래~~♡

나는 이러한 오해로 인해 그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특히 관계를 이어가며 사소한 일로 틀어졌을 때 정신적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사소한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닌 게 되어 버리기도 했었다. 그럴 땐 참 아팠다. 눈물도 흘렸고 가슴도 쓸어내렸었다. 오해란 상처라는 생각이 든다. 하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게. 그러나 때론 오해를 그냥 두어야 할 때도 있다. 굳이 풀어야 할 만 가치가 없거나, 풀다가 더 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 잡은 종이배가 물결을 따라 둥실 떠가는 모습을 보며 어디에선가 멈춰 버릴 걸 알면서도 시야에서 멀어질 때가 바라보듯 말이다. 이제는 조급하게 상대를 힘들게 하며 미안하다는 말 조차하지 않는 비겁한 나르시시스트 같은 부류들을 상대할 힘도 적잖이 생겼으며,  관용(Tolelance)을 베풀 줄 알며, 거리에 핀 작은 꽃의 아름다움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하늘이 가지고 있는 양면(밝음과 어둠)을 이해하며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지금 나의 곁에 누워 엉덩이를 살짝 기대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인 감자(몰티즈 7살)와 함께 말이다.

언제보아도 감자는 사랑입니다. 제겐 그래요.
매거진의 이전글 부엌에서의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