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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e Dec 12. 2023

미술관에 대한 단상

2024년 12월.

현대의 미술에 대해 2010년대 프랑스의 아트 큐레이터이자 미술평론가 '리콜라스 부리오(Nicolas Bourriaud1965-현재) '는 '관계미학 Relational Aesthetics'을 말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관계미학이란 쉽게 풀면 철학, 문학, 예술 등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화가들은 캔버스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철학과 사고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의 선과 움직임, 리듬, 정지와 흐름 등을 읽는 것은 관람자의 사고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이가 바로 '아트 큐레이터(이하 큐레이터)'이다. 큐레이터는 단순히 작가를 선정하여 작품을 벽면에 전시하는 것이 아닌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통해 스토리 즉 서사를 만들어 관람자들의 작품 몰입과 포컬(Focal-작품의 중심)이 무엇인지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참고) 부리오는 세계화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서 예술 및 예술실천이 자본주의적 이윤법칙과 무관한 영역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미술들은 권력자의 소유물이었으나, 여러 단계를 거치며 추상미술의 이후 현대에 있어 미술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창출을 위한 수단일 수도 있으나, 대중적임을 넘어 사유의 수단으로 삶이자 숨이 되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현대의 미술가는 선과 색으로 표현하는 철학자이다. - Celine Youn.

며칠 전 아빠께서 책선물을 하셨다. 카드를 내어 주셔 책은 내가 골랐지만 감사하다. 미술에 대한 공부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국내, 외 많은 미술관계자들을 만나며 요즘 느낀 것은 위에서 언급한 역할을 충실히 하는 큐레이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미술관의 운영자는 좋은 전시를 바라지만 큐레이터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실제 존재한다.) 간혹 좋은 전시를 만날 때면 참 행복하다. 작가와 작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서사敍事의 부여). 그래야만 컬렉터 즉 구매자도 이러한 그림은 나를 대변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것이며 이것은 구매와 판매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시회를 개최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전시 공간(높고 길거나 낮고 넓거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에 들어설 때면 나는 늘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했던 '퇴폐미술전'이 떠 오른다. 작가의 고민이 무엇이며 전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준비 없이 닥지닥지 벽면에 설치하거나, 그림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벽면을 장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부러 이러한 전시를 기획한 것인가?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때론 고미술품 등을 전시할 때 전시물을 보호하는 장치가 없거나, 하다 못해 바닥에 라인조차 없는 전시를 보기도 하였다. 이때 전시물이 파손되었을 경우 책임소재는 누구의 몫일까? 참 마음이 아프다. 좋은 전시란 작가와 작품을 이해와 집중 분석을 마친 후 전시공간을 작품이 지배하는 자신감과 서사가 있는 공간 창조라 생각한다. 

현재 베트남 최고의 화가 풍팜(현재91세)의 화집을  우편으로 선물 받았다. 화집을 펼치고 눈물을 훔쳤었다. 나이를 느낄 수 있는 흔들리는 선의 친필 싸인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하노이 국립박물관에 갔을 때 만난 전시회가 생각난다. 박물관 2층에서 만난 작가는 구 소련에서 미술공부를 한 베트남 최고의 현대화가였다. 설레는 맘으로 만난 그의 기법은 매우 독특하며(기존의 캔버스는 밑그림으로 이용하며 액자의 유리를 2차 캔버스로 이용하였다), 표현주의자들의 강렬한 색채감을 느낄 수 있는 전시였다. 그러나 1전시관을 제외하고 2전시관부터 3층까지 좁은 공간의 벽에 작품을 빈틈없이 빽빽이 전시하였으며, 전시 동선조차 없을 만큼 바닥엔 목재부조를 전시하여 회화와 조각 작품이 마구 뒤엉켜 있었다. 걷기조차 힘든데 작품을 관람하라니? 이런 불친절한 전시회가 있을까? 다른 곳도 아니고 국립박물관의 큐레이터가 왜 이런 동선과 공간을 만든 거지? 많은 질문을 던졌던 좋지 않은 기억이 남은 전시회였다. (아마도 공간은 좁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았던 것 같다. 나였다면 정말 봐야 할 작품만 선정하여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였을 것이다.)

조각작가님께서 나의 글씨체로 도장을 만들어 보내주셨다. "셀린 이 도장을 찍으면 좋은 일이 많을 겁니다."감사하다. 내가 뭐라고 이러한 선물들을 받다니.  

생각이 많다 보니 요지는 하나인데 긴 글이 되어 버렸다. 전시회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들은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이것은 단순히 큐레이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 개별적 철학을 갖고 임하였으면 한다). 많은 이들이 큐레이터를 '백조'에 비유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우아함을 갖춘 것으로 보이나, 물속에서는 쉴 새 없이 물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아'라는 것으로 치장하기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움직이길 바란다. 작품을 잉태하는 작가의 고통과 관람자의 사유를 위해. 작품은 그저 물건이 아닌 사유의 장(場)이며 그 사유의 가치는 삶 즉 인생에 있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ulV-M0i25Y&list=PLrEStZbOs90FwiiJf-KUT3__1tdpTDDSp&index=5

Gentle on my 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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