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에 대하여.
어린 시절, 나는 덜렁거리는 신발주머니를 손에 들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길가에 핀 작은 꽃들을 들여다보거나,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잊고 말았다.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세상은 늘 새롭고 신기했다. 그런 나를 기다리던 엄마는 불안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으로 내 작은 등을 따끔하게 때렸다. 괜한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그 일은 다음 날에도 또다시 반복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넌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어”라며 웃지만,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그러나 엄마가 있는 집, 따스한 품이 기다리는 곳. 골목 모서리에 자리한 집 앞에 다다를 때마다 풍겨오던 밥 냄새는 늘 마음이 포근했었다. 지금도 그 냄새, 그 따뜻한 온기가 그립고 아련하다.
나의 엄마는 늘 병약했지만, 손재주만큼은 남다른 분이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옷을 손수 지어 입히고, 책가방마저 만들어 주셨다. 겨울이면 스웨터와 장갑, 목도리, 양말까지 손뜨개질을 하셨고, 스케이트 보호대까지 직접 만드시던 분이다. 손만 대면 뭐든 척척 만들어내던 엄마의 손길은 마치 작은 마법 같았다. 감자 하나로도 남들이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새로운 요리를 탄생시키던 분, 아이디어 넘치고 감각적인 감성의 천재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와 달리 손재주도 없고, 요리조차 서투르다. 정리와 청소도 어설프다. 언제나 어질러진 내 집에 엄마가 다녀가면, 냉장고부터 반짝반짝 빛난다. 혼자 사는 딸이 굶을까 염려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오던 엄마. 이 나이에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때때로 부끄럽지만, 결국 ‘엄마’라는 존재는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우주적 필연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에 삶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아주 나이 든 사람은 내향적이고 무감각하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이 내향성은 순수하고 조화를 이룬다. 어머니의 존재가 늘 그러하듯.”
— 케테 콜비츠, 1924년 10월 22일,
삶을 마감하기 수개월 전의 일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 케테 콜비츠를 비롯해 에밀 놀데, 빈센트 반 고흐, 마크 로스코, 그리고 빛의 명상가 제임스 터렐을 꼽겠다. 이들의 작품에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을 어루만지는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케테 콜비츠(1867-1945)는 화가이자 판화가로서 독일을 대표하는 ‘어머니상’이며, 반전과 민중의 상징으로 오늘까지 기억된다. 콜비츠의 사상은 한국 민중미술과 중국 루쉰이 이끈 판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제약되었던 시대임에도, 그녀는 예술을 통해 사회적 역할을 묵묵히 실천했다.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외조부에게 배운 사회적 책임감과 인류애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 깊게 배어 있다.
콜비츠는 일찍이 드로잉을 익혔으나 조각과 판화에 매료되어 평생 그 길을 걸었다. 남편이자 의사였던 칼 콜비츠와 함께 빈민가에서 무료 진료를 이어갔고, 그녀의 작품은 소련에서도 사회주의적 예술의 귀감으로 평가받았다. 1930년대, 베를린 미술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명되었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43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판화와 화집이 불타 사라졌고, 그녀는 1945년 4월 22일, 평생의 고통을 안고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남긴 판화는 275점에 이른다.
그녀의 삶은 비극과 동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 페테를, 제2차 대전 중 손자 페테(사망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지어 줌)를 잃었다. 콜비츠는 이 상처를 판화로 승화시켰다. 작품 속에는 전쟁의 참혹함과 민중의 고통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운 이 이미지는 당대 사회를 향한 그녀의 처절한 철학이기도 하다. 자화상마다 고뇌와 사색이 깊게 배어 있다. 석판화와 목판화를 고집했던 이유도 전쟁 중 손에 넣기 쉬운 재료였기 때문이다.
콜비츠의 현실과 작품 세계는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이유 없이 죽은 이들의 절망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어머니’라는 이름 아래, 자식을 잃은 고통과 전쟁의 잔혹함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빵을 구걸하는 아이들의 무표정한 눈빛은 생존을 위한 본능을 절박하게 드러낸다. 누가 이 순수한 영혼들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었단 말인가. 그녀의 모성애는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피에타, 1933〉에서 극에 달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상징한다면, 콜비츠의 피에타는 거친 슬픔 그 자체다. 그러나 나는 그 슬픔 속에서 오히려 숭고함을 본다.
오래전 읽은 케테 콜비츠 평전(카테리네 크라머 저/2004/실천문학사)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연구 논문을 위한 독서였지만, 그녀의 일기는 이안 매큐언의 소설 속죄(2003/문학동네) 보다도 더 차갑고 사실적으로 인간 심리를 파고들었다. 콜비츠의 작품은 연작이 많다. 그중 〈직조공 봉기 연작, 1897〉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처럼 강렬하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면 이 연작부터 찾아보길 권한다.
“내 인생에서 격정과 고통, 기쁨은 얼마나 강렬했던가. 그때 나는 진정 투쟁 속에 살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전쟁이 다가왔다. 희생양이 된 페테, 그의 죽음과 함께 내 힘도 꺾였다. 고통과 사랑마저 그가 앗아가, 나는 점차 무너져 내렸다.”
— 케테 콜비츠, 1918년 7월 일기 중에서
얼마 전, 강남역 약속을 마치고 분주히 움직이다 보니,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있는 동안 아들의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두었을 뿐이었다. 돌아오는 길, 멀리 유학 중인 딸과 아들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살아계실 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이 나이 든 딸을 살뜰히 챙기셨지만, 나는 과연 엄마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는지 자문했다. 그 탓일까, 돌아온 나는 몸살에 휘청였고, 밤새 약에 의지해도 잠들 수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약의 힘으로 겨우 자리에 앉아 있다. 그래서일까, 문득 엄마가 몹시 그립다. 지금이라도 엄마를 부르고 싶지만, 더는 내 아픔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 그리움을 목구멍 깊숙이 삼켜본다.
사랑하는 나의 딸과 아들아, 엄마가 너희에게 사랑을 다 주지 못해 늘 미안하다. 그러나 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이 우주에서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너희들이며, 세상에서 너희를 만난 것이 엄마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빠와 비 오는 하루를 함께 보냈다. 늦은 낮잠을 한참 자고 일어나. 2025.5.9.
https://www.youtube.com/watch?v=Utm4T6lT7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