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평론가들이 나를 표현주의자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렇게 규정지어지는 것이 싫다. 나는 그저 독일인 예술가이다.”
십여전 일이다. 뜨거운 여름, 매미가 그토록 지겹게 울어대던 그 날! 나는 언니와 덕수궁 미술관을 찾았다. 독일 미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언니는 베를린의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년이 흐른 후였다. 전시장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독일어로 표현된 문구들을 적혀 있었다. 언니는 나에게 말하길 "몇 년 사용하지 않았다고 독일어가 생각이 잘 안나네"하면 자신의 기억을 더듬자 독일어가 생각난다고 하였다. "저 글은 이런 뜻이야. 그리고 여기의 이 작품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적혀있네" "너 잘 받아 적고 있니?" 하며 나를 공부시키는 선생님 마냥 계속 채근하였다. 누가 선생 아니랄까 봐 동생에게도 선생질이냐?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진짜 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종이라 볼 수밖에 없는 무지의 죄?라고 생각하며 언니의 설명을 따라 들었다. 한참을 돌았을까? 검푸른색 하늘과 호수 그리고 지는 석양이 마치 노란 달걀노른자와 같은 모습으로 떠 있는 그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것이 바로 '에밀놀데의 그림'이었다.
<달빛이 흐르는 밤/에밀놀데/69cmx89cm/oil on canvas/1914>
순간 언니는 나에게 말을 건넨다."내가 참 바보 아니니? 독일에 살 때 공부하고 애 보고 형부 뒷바라지까지 죽을 노릇을 다했잖아. 그런데 하루는 부동산 아줌마가 찾아와서 내가 살고 있는 거리가 독일에서 아주 유명한 화가가 살던 거리라며 설명을 하고 또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었어. 그리고 그의 생가는 바로 우리 집에서 마주 보는 집이었다. 글쎄 알고 보니 그 거리가 놀데의 거리였고, 그 마주 보이던 집이 바로 놀데가 작업을 하던 집이었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독일에서 유명한 화가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었잖아." 알고 있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안다는 말이 있듯이 언니는 당시 두 아이의 육아와 살림을 하며 학교 공부에 정신이 없던 터라 예술이고 뭐고 신경 쓸 틈이 없었던 것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예술과 철학 같은 소리는 배부른 소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형부는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황금 송아지를 에워 싼 춤/에밀 놀데/88cmx105.5cm/1910>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7)은 독일과 덴마크의 국경 사이 지역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에밀 한센'이다. 그가 놀데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02년 자신의 고향 마을의 지명을 따와 이름에 사용하기 시작하여 우리는 지금 그를 에밀 놀데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고향 마을의 지명을 이름으로 사용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목가적이고 자연적인 그리고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자연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성장한 마을을 평생 그리워했으며 도시를 끔찍이 저주하도록 싫어했었다. 놀데는 목각사(木刻師)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우편엽서들을 그려 팔아 부족한 수입을 보충했다. 이후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뮌헨과 파리로 떠났다.
놀데는 자연의 본성을 사랑하였다. 위의 그림 <황금 송아지의 춤>에서 보이듯 서로 피부색이 다른 여인 들은 마치 무아지경에 빠져 혼신을 다해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토착신에게 제의를 지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신을 향해 진심을 다 하여 온 몸으로 춤으로써 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림은 강렬하며 붓질은 매우 두텁고 거칠다. 이러한 점들은 그림에 생동감을 주는 하나의 커다란 요소이다. 이 그림은 뉴기니의 흑인 토착민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기에 놀데는 이 곳을 여행하며 토착민들의 모습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당시 뉴기니는 독일의 식민지 영토였다.)
<뉴기니인들/에밀놀데/73cmx100.5cm/oil on canvas/1915/에밀놀데재단>
<최후의 만찬/에밀 놀데/캔버스에 유채/ 86x107cm,/1909/코펜하겐 국립 미술관>
놀데는 한때 나치즘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실제 그 사실에 대한 논문도 발표가 되어 있다. (나는 그 논문을 해석하며 읽었다. 아주 어렵게ㅜ. 그러나 놀데는 나치를 옹호한 것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독일을 사랑하였고, 독일인임을 자랑스러워했었을 뿐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자화상/에일놀데/1912>
그가 친 나치 행동을 한 것에 대한 특별한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 회의장에서 자신은 독인일이며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자연과 목가적인 풍경을 매우 사랑했으며 신이 내려주신 자연을 훼손시키며 만들어 낸 도시라는 창조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또 그는 신앙심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나온 인물들의 표정과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면 매우 선명한 인물의 표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데는 서구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인물을 설정하였다. 성경에 심취한 그는 유대인들을 그림에서는 옹호하였으며 진정 최후의 만찬 주인은 유대인임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놀데는 나치에게 감시 자체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종교화에 유대인을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국노인/에밀 놀데/펜과 잉크/1913/아다와 에밀놀데재단 독일>
<한국소녀/에밀놀데/펜과 잉크/아다와에일놀데재단 독일>
또한 놀데는 한국을 방문한 유일한 화가이기도 하다.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 색동저고리에 매료되었으며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했었다고 그의 회고록에는 적혀있다. 그리고 한국 장승의 영향으로 <선교사>라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장승/베를린 민속 박물관..2.<선교사/에밀놀데/oil on canvas/75cmx65.5cm/베를툴트 굴라우에르트 컬렉션>
<Sunrise at the Sea/에일놀데/수채물감/1927>
놀데의 그림은 때로는 거친 붓질로 인해 살아 꿈틀대는 그 역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도 하지만 그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와 정물화는 대부분 수채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꽃잎의 여리고 얇아 손을 대면 금세 꽃잎에 손자국이 나는 것과 같이 그가 그린 정물화들은 여리고 청순하며 그러면서도 매우 당당한 모습이다. 위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는 해에 비친 구름은 붉게 물들어 있으며 붉은 굽이치는 구름은 바다에 비쳐 그 모습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순간의 포착이지만 선이 없는 그의 그림 즉 색채로만으로 경계를 지어 표현한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부드러운 사색?과 따스한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빨간 양귀비 꽃/에밀놀데/수채물감/1920>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분명한 선?을 긋기도 하고 너는 너, 나는 나. 나의 경계는 여기까지라고 하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분명한 선 긋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놀데의 그림을 다시 보며 선 없는 색채에 다시금 생각하게 하였다. 그것은 경계를 짓되 나를 중심으로 할 것이며 중요한 사실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놀데의 그림에서 보았듯 그의 그림에는 선이 없다. 섞인 물감의 색들은 자신을 차분히 드러내며 서로의 색을 인정하는 그 자체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나의 벨소리인 Turning. 아주 오래 전 곡(1999)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 곡을 좋아한다. 곱디 고운 그리고 아름답고 몽환적 목소리와 달리 가사는 참 슬프다.
명절을 혼자 보냈다. 지독한 감기가 나아질 기미가 없었기에. 가족들에게 옮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 글은 작가의 서랍에 열번이상 저장 되었었다. 아플 때 마다 한 줄씩 적어 나갔기 때문이다. 지금도 목은 간질거리고 기침은 끊이질 않는다.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 다행히 독감은 아니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