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를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

영화 <퍼펙트 데이즈>처럼 살아가는 완벽한 하루, 하루

by 온우
내면의 행복에 대한 책임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녀는 혼자서 찾아오지도, 혼자서 떠나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세상을 향해 떳떳하게 소리쳐보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던 우리는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에바 알머슨(eva armisen), 스페인 화가
eva1.jpg 에바 알머슨 Flying (출처: odetoar)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에바 알머슨 작품전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작품설명 글귀가 마음을 사로잡아서 짧지 않은 글들을 노트에 빼곡하게 적어왔다. 그녀의 작품 전반에 보이는 따스함과 온전한 밝은 기운은 이런 단단한 내면에서 나온다는 게 느껴졌다.


나의 행복은 나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욱 아기와 보내는 하루하루를 즐겨보려고 고군분투하는 나날이었다. 아기의 예쁜 모습이 많았는데도 내 몸이 힘겨워서 사진조차 한 장 남기지 못한 날이면 자기 전에 다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속상한 마음이었다. 수면 부족과 이제 7kg가 훌쩍 넘는 아기를 계속 안고 다녀야 하는 육체적인 피로가 가장 힘들었지만, 매일 4시간마다 돌아오는 4번의 수유, 2시간에 한 번 낮잠 재우기, 그 사이 시간에 놀아주고 기저귀 갈아주기..라는 단순한 일상만이 반복되는 게 지루하고 답답했다. 추운 겨울에 아기를 데리고 바깥에 쉽게 나갈 수도 없고, 나 혼자 아기를 책임져야 하니 아기를 두고 어딘가 나갈 수도 없었다. 아기가 가장 예쁘다는 지금, 난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기에 급급했다. 온전히 행복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만났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을 그리는 잔잔한 영화다. 그의 일상의 루틴은 매일이 똑같다. 새벽의 시간, 창밖에서 쓱쓱 빗자루로 청소를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정갈하게 씻고 물건들을 챙겨 나오면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는다. 차에 빼곡한 카세트에서 그날의 선곡을 고르고 운전을 해서 일터로 향한다. 매일 같은 장소를 청소하고, 같은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같은 자리에서 공원 나무에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다. 일을 마치면 항상 가는 식당에서 간단히 술 한잔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주말이 오면 세탁소에 들렀다가 평일동안 찍은 사진을 인화하러 사진관에 간다. 지난주에 맡겨둔 사진을 찾고, 새 필름을 사 오는 반복되는 루틴. 집에 돌아오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상자에 넣어둔다. 이내 자전거를 타고 조금 멀리 단골 가게에서 술 한잔을 기울이면 그의 휴일이 끝난다.


영화에서는 내내 주인공의 이 반복되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을 따라간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얼굴에는 늘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최선을 다해서 청소를 하고, 때론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았다. 청소를 하다가 화장실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 때문에 잠시 일을 멈추게 되는 순간에도 그의 눈빛은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로 향한다. 그 잠시의, 누군가에게는 업무 방해 시간일 수 있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환한 미소를 짓게 하는 시간이다. 공원 나무 아래에 작은 나무 새싹이 싹을 틔우면 조심히 담아와 집에서 가꾼다. 때론 뜬금없이 조카가 찾아와 일터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가 난데없이 여자친구를 데려와 차를 빌려가는 날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루틴이 깨졌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삶이 주는 작고 큰 변주를 온전히 즐긴다.


히라야마상을 보면서 영화 <소울>이 생각났다. 태어나기 전의 영혼의 세계에서는 '삶의 이유'를 찾아야 지구로 갈 수 있는 배지를 얻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데, 주인공 22는 그 이유를 찾지 못해 계속 영혼의 세계에 남아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22가 찾아낸 삶의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풍나무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온 단풍 씨앗, 맛있는 피자 한 조각, 지나가면서 들었던 노래... 그저 내가 현재 즐길 수 있는 걸 온전히 즐길 줄 아는 것. 그게 삶의 이유였다. 히라야마상은 마치 삶의 진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삶이 주는 즐거움을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것을 정말 싫어하던 나였다. 그래서 직업도 매일 하루가 다르고 매번 프로젝트마다 새롭게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일을 선택했다. 하지만 히라야마상을 보며 나의 하루를 사랑하는 방법은 바깥에 나가서 매번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데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루하리만큼 단순하게 반복되는데 삶의 묘미가 있다. 그 안에 삶이 주는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건 나의 몫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기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만큼이나 단순하고, 지루하지만, 매일이 또 다르게 행복한 것이 있을까 싶었다.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나의 이 단순한 하루에도 그 사이에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오늘 하루를 영화로 찍는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으로 마치 내가 히라야마상이 된 것처럼 하루를 살아보기로 했다.


새벽 7시, 아기와 인사를 하고 첫 수유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9시, 아기가 첫 낮잠을 자러 간 시간에 나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30분 동안 침대에서 쉬었다. 아기가 깨면 한 손은 아기에게 내어주고 잡아당기기 놀이를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의 아침 식사를 했다.


오전 11시, 아기에게 두 번째 밥을 먹이고, 하루 중 가장 긴 두 번째 낮잠을 자러 간 시간 동안 다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매번 30분 단위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아기를 두고 쫓기는 마음으로 늦은 아침을 먹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힘에 겨워서 멍 때리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예전에 업무를 할 때 썼던 구글 타이머를 꺼내 30분을 세팅했다. 아기의 랜덤 낮잠이 30분이 될지, 2시간 30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타이머가 채워져 있는 30분만큼은 나의 시간이니까,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했다. 아기가 30분이 지나 낮잠을 연장하면 다시 쉬는 시간 30분이 추가되었다.


오후 3시, 3번째 수유를 하곤 날이 많이 춥지 않아 아기랑 공원 산책을 나섰다. 그리곤 집에 돌아와 아기는 마지막 낮잠을 자고, 난 저녁밥을 먹었다. 드디어 마지막 놀이시간. 아기를 재우고 나면 이 순간이 아쉬워질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목욕 시간을 함께하고 마지막 4번째 수유를 했다. 트림을 하다가 내 어깨에서 곤히 잠든 아기를 침대에 눕혔다.


오후 8시, 아기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 9시에는 필라테스 수업에 갔다가, 오후 10시 반, 설이가 잘 자는지 마지막으로 예쁜 자는 모습을 한 번 보고 이불을 잘 토닥여주고 아기 방을 나선다. 이제 나도 잘 시간이다.


똑같이 흘러가는 나날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내 영혼이 깨어있었고 모든 시간들이 지루하기엔 그저 즐거웠다. 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온전히 내가 쉬고, 아기가 깨어있을 때 집안일, 밥 먹기 등 필요한 일들을 미루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힘들게 밥을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이렇게라도 울지 않고 잘 놀아주고 밥을 먹게 해 준 아기에게 "고마워"라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기의 긴 오후 낮잠 동안에는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사슴을 하나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톡 튀어나온 이마가 꼭 우리 아가랑 닮아서 '아기 사슴 설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게 뭐라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사실 하나로 하루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히라야마상도 일하러 갈 때 굳이 그 무거운 아날로그 카메라를 챙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만나는 공원의 나무를, 계절의 변화를 한 장 찍는 것이 그에게는 하루의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마음가짐이 바뀌고 나니 홀로 육아를 하는 나날도 즐거움이 가득했다. 하루빨리 복직을 해서 일을 하러 나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휴직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아쉬운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젠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설레는 일들이 더 많아졌다. 아기가 아침에 깨어나면 가장 행복한 얼굴로 날 맞이해 주는 게 기쁘다. 아기의 두 번째 긴 낮잠 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무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채우지' 하는 설레는 마음이 된다. 또 아기가 깨어날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면 다시 귀여운 아기와 함께 할 시간이 기대가 된다. 에너지를 모아 아기가 놀이에 지루해질 때 즈음 가장 좋아하는 비행기를 태워준다. 세상에서 가장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는 아기의 모습에 나도 소리 내어 웃는다. 아기의 통통한 볼에 입을 맞추면 보들보들한 기분에 나도 웃고, 아기도 좋다며 환하게 웃어준다.


아기와 함께한 지 145일 차, 드디어 육아가 내 삶의 일부가 되고 진정으로 아기와 함께 하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어서 봄이 오고 현이가 휴직을 하면 세 가족이 함께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고, 나의 직업이라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내게 주어진 이 하루하루를 온전히 사랑하기로 한다. 그게 삶의 이유고 삶의 즐거움이니까.


아기가 잠든 지 30분이 지났고, 아기는 아직 곤히 잠들어있다. 다시 타이머에 30분을 채운다. 이렇게 글을 쓸 시간을 선물해 준 아기 천사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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