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에 대한 단상
신병훈련소에서는 친절하게 군복 사이즈를 물어보지 않는다. 입소와 동시에 산더미 같은 옷더미를 가리키며 10분 안에 사이즈 맞는 옷을 찾아 입으라 명령하는데, 재밌는 건 그 수백의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또 자기 옷을 찾아 입는다. 아니 옷에 자기를 맞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처음에는 안 맞고 어색하고 미칠 것 같은데 근데 재미있는 건 그렇게 며칠 지나다 보면 진짜로 자기가 옷에 맞춰 커지거나 작아진다는 점이다. 아 물론 그게 진짜 내 사이즈는 아니다.
어쩌다 요즘 MBTI가 다시 주목받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처음 MBTI를 접한 건 정확히 21년 전 대학교 1학년 때다. 갓 입학해 친구도 뭐도 없던 시절 무료한 토요일을 무얼 할까 고민하다 학생생활연구소(?) 뭐 그런 데서 무료로 진행하는 MBTI 검사를 신청했고 만 하루 동안의 워크숍 결과 내 MBTI는 "ENFP"로 결정되었다.
외향적이고,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며, 즉흥적인 사람.
진짜로 내가 이런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성적표를 받아든 나는 꾸준히 이런 사람이 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아 난 E라서 늘 친구들을 찾아', '야 난 N이라서 직관을 믿지 훗', '나 P잖아. 계획 짜는 거 못해.', '난 F라 그런가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아' 따위의 대사를 질리도록 내뱉으며 나는 1/16의 유형에 끊임없이 나를 맞추었고, 결국 내가 ENFP고 ENFP가 나인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힘이 난다고 믿었던 나는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나를 만났다. 그 밤 둘러앉은 사람들은 좋았고, 분위기는 꽤 즐겁게 익어갔지만, 그와는 별개로 난 '집에 가고 싶다'를 속으로 수백 번 외치고 있었다.
'그만!!'
싫지는 않았지만 꽤나 힘들었던, 새벽까지 이어진 자리의 여파는 굉장했다. 나는 며칠을 드러누웠다. 그렇게 혼자 빈방에 누워 드라마를 몰아보다 문득 나 혹시 ENFFP가 아니지 않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의심은 짙어졌고 나는 결국 MBTI 검사지를 다시 구입했다. 그리고 문제를 풀어보려는 찰나 나는 깨달았다. 나는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이 문제는 E, 이 문제는 N, 이 문제는 F, 이 문제는 P를 향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MBTI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ENFP를 벗은 건 생각보다 후련했다. 그때부터 나는 힘들면 집에 들어가 쉬었고, 숫자를 보고 판단했으며, 감정이 아니라 팩트를 보고 결정했다. 어느 정도의 하루 타임 테이블을 정하고 그대로 움직였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 규정지어 놓은 어떤 모습이 아니라 그냥 나로 살았다. 누군가 MBTI를 물어오면 'SELP'라고 대답하고 웃어버렸다.
가끔 MBTI를 떠올리며 신병 훈련소에서 내가 끼워 넣던 작은 전투복을 떠올린다. 이 옷을 입고 어떻게 한 달을 보내냐 싶었는데 나는 한 달을 불편한지도 모르고 견뎌냈다. 그 옷이 내 옷이 아니라는 건 그 옷을 벗어버릴 때야 알 수 있었다.
신은 사람의 형상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게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물론 도구를 활용하여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아가는 건 좋은 일이라지만 도구에, 혹은 타인의 평가에 과몰입해 누군가 규정한 틀이나 기대에 무리하게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MBTI고 뭐고 남들이 규정한 것 말고,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 말고, 진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
난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