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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Aug 24. 2023

1930년, 여성에게 허락된 세계여행

<여행하는 여성, 나혜석과 후미코> 나혜석, 후미코 저


1930년, 조선여자와 일본여자의 세계여행이라니. 무심코 도서관 책장을 훓다가 딱 멈춰 섰다. 아마도 이 책을 기획한 이는 천재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하기 힘든 세계여행을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 여성이, 그것도 식민지 조선의 여성과 제국 일본 여성의 여행기라니. 흥미로운 주제에 책을 안 집을 수가 없었다.

먼저 오해가 있을까 짚어 두자면 책은 친구인 두 여성이 함께한 여행기가 아니다. 책은 당대에도 출간되었던 조선 여성 나혜석의 <구미 여행기>와 일본 여성 후미코의 <삼등 여행기>를 나란히 두고 중간에 잇는 글로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두 여성을 자연스레 연결한다.


조금 갸웃했던 건, 당연히 식민지 조선 여성이 3등 칸이고 제국 일본 여성이 1등 칸이라 생각했던 전개와 좀 달라서였다. 그랬다. 이야기는 조선 최고의 엄친딸, 조선 최초 서양화가이자 셀럽이었던 나혜석의 이야기와 제국주의 따위는 모르겠는 그저 일본의 꿈 많고 끼 많은 청춘 후미코의 세계여행 일지다.

그렇기에 어디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낀 나혜석의 이야기와 기차 안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며의 느낌을 기록한 후미코의 이야기는 참 많이 다르다. 전자는 철저히 시간과 장소 중심의 안내서 느낌이라면 후자는 청춘의 방랑 일기 느낌이다.


사실 '나혜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이런 그녀의 글은 굉장히 의아했다. 1930년의 조선 여성. 물론 모던보이라는 이들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의 수탈에 너 나 할 것 없이 굶주리고 어려운 시기였다. 교육은 커녕 내일 먹을 쌀 한 톨을 걱정해야 할 시기에 친일파 남편의 포상휴가 격으로 그녀는 남편과 함께 부산에서 출발해 러시아, 스위스, 파리(심지어 좋아하는 오페라 '카르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를 거닐고 심지어 여행 중 이왕을 만나기도 한다. (맞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다.) 나아가 그녀는 미국과 일본을 거치며 뉴욕, 서재필 박사, 시카고, 나아이가라, 그랜드캐니언, 할리우드, 하와이까지 야무지게 자신이 다녀온 곳들을 기록하는데, 당대 이 기록이 여행은 커녕 매일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 사실 좀 의아스럽긴 했다.


'나혜석'이 누구길래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고, 또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졌고, 그녀를 다룬 몇 개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인형으로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세상과 맞섰던 신여성, 독립운동(그녀는 관료 남편을 둔 덕에 은밀히 독립투사들을 석방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과 친일파 남편 사이 어디쯤에서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여성. 이혼과 불륜으로 얼룩져 평생을 엄친딸로 살았으나 결국 어느 병동에서 무연고자로 사라졌던 여성.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 나혜석의 이야기는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이에 반해 후미코의 삼등여행기는 흡사 오늘날 유튜버의 세계여행기를 방불케 한다. 책 <방랑기>의 성공으로 받은 작은 인쇄로 시작된 기차여행은(심지어 가장 싼 기차) 다름 아닌 청춘의 그것이다. 가진 거라곤 젊음이 전부인 후미꼬는 매일 남은 돈과 쓸 돈을 세며 즐겨야 할 것에 사용할 돈의 가치를 비교한다. 낯선 거리를 거니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가자면 신나기도 하고, 젊고 가난한 동양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서양인들의 태도에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렇게 유럽을 돌아보고 고베항으로 돌아온 후미코에게 남은 건 달랑 30 전. 여행을 마친 고국에서 그녀는 4전 짜리 가락국수를 세상 맛있게 먹는다. 더 이상 눈치 볼 사람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 불편함도 없는 본국에서 지난 일 년간의 여행을 돌아보며 그녀는 말한다. 이제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여행이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버렸다고. 그 젊음이 싱그러워 나까지 덩달아 여행 길에 오르고 싶어졌다.


1930년, 남성의 여행만이 허락되던 시절에 상황도 조국도 경제적 여건도 나이도 모두 다른 두 여행 기록을 읽자면 괜히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녀들은 그 여행을 통해 무엇을 남겼을까? 또 어떤 마음으로 남은 세상을 살아갔을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기에 조금 더 그 글타래들이 마음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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