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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Nov 25. 2023

당신은 그 죽음을 끊어낼 수 있는가

<단명소녀 투쟁기> 현호정 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제목 같더라니 구전소설 <북두칠성과 단명 소년>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복시킨 소설이다. 북두에게 죽음을 예언 받고 죽음을 피해 도인들을 만나 명을 연장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녀가 대뜸 ‘싫다면요?’라고 하며 죽음을 피해 떠난 여행으로 치환된다. 목숨을 걸고 도사들에게 방법을 구하는 소년과 달리 적극적으로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소녀의 모험기는 그래서 언뜻 신나고 가볍다. 혼자였던 원작의 소년과 달리 주인공 수정에게는 이안이라는 친구도 있다.


수정은 대학 입시를 묻기 위해 북두를 찾는다. 이때만 해도 수정은 입시-취업-결혼-출산으로 이어지는 소위 보통의 삶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 앞에 각성한 소녀는 이제 주어진 죽음이 아닌 주체적 삶을 결정한다. 이제 수정의 매일은 삶을 위한 여행이고 모험은 그 삶을 유지하게 하는 투쟁이다. 


여행을 시작한 수정과 이안은 세상에 없는 환상의 장소들로 이동한다. 검은 산들이 어깨를 맞대며 커다란 초승달처럼 주위를 감싼 분지, 산딸기가 열린 덤불 곁의 집, 저승의 바위 사막, 작은 섬 등 세상에 없는 공간들을 전전하며 노인과 아이들 등을 만난다. 그리고 수정은 그들에게 백 살까지 살 수 있다는 백설기를 나눠준다. 한편 수정과 이안은 악사, 농사꾼, 청소부, 눈-인간, 모기-인간, 허수아비-인간 등을 만나 이들을 죽이기도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이들, 베고 나니 사람인 줄 알았던 이들이 어지럽게 섞여 삶을 버텨가는데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피 냄새에 노출된다.

이러한 수정의 칼 끝에 저승 신은 말한다.


-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경고야? 

- ...

-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병실에서 깨어나는 수정에게 이제는 어디서부터가 꿈이었는지 혹은 환상이었는지 나아가 수정 자신조차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수정은 삶을 위한 여정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이고, 그가 투쟁에서 이룬 것처럼 그의 남은 생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말한다. 살아남기 위해 가난을 부로, 실패를 성공으로, 승리로 다른 이를 죽이고 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그것에 성실과 열심을 더할 때 너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저승의 신은 이것이 질서라고 말한다. 세상에 두 명을 위한 자리는 없음을. 누군가가 존재하기 위해 누군가는 죽어야 함을 말한다. 그는 기꺼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약한 것들과 작은 것들을 몰아낼 준비가 된 자였다. 수정과 이안은 이 논리를 거부한다. 등수에 따라 번호를 매기고, 또 그 번호에 따라 결정되는 삶을 거부하며 함께 청소부를 죽인다. 그리고 이후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같이' 헤쳐 나간다.

그렇게 폐허라 부르는 공간을 쉼터로 바꾸며, 몰락이라 부르는 실패를 휴식이라 이름하며 자신의 삶을 구축한다.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오롯이 구수정 자신의 삶을.


책을 읽으며 새삼 그녀의 강단이 부러워졌다. 일등은 못될지언정 어느 정도 남들의 보폭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방향의 삶이라 믿었던 내 좁은 마음이 이내 부끄러워졌다. 수정은 곧 죽는다는 도사의 이야기에도 죽음을 거부하고 삶을 택했다. 나는 아직도 까마득하게 먼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을 할 수 있는 한 유예하고 있다. 


결단(決斷)은 재미있는 한자어다.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린다는 의미인데도, 결심할 결자와 끊을 단자가 합쳐져 있다. 무언가를 끊을 결심. 수정은 삶이 끊어진다는 예언을 받고 죽음을 끊어버렸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죽음을 끊어낼 준비가 되어있는가? 이제 결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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