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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Nov 19. 2023

긍게 사람이제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저

왜 이 책이 이렇게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까. 꽤 오래전부터 읽으려 도서관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내 차례가 왔다. 그리고 한동안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해방'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낯섬과 거기서 툭 튀어나와 나를 사로잡을 것 같은 이데올로기가 조금은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개인의 구원으로 가져온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비슷한 결일 거라 생각했다. (<나의 해방일지>가 22년 4월 방영, <아버지의 해방일지> 초판 인쇄가 22년 9월이니 아주 상관이 없다고 볼 수도 없겠지만은) 그런데 웬걸. 책은 내가 상상하던 내용과 사뭇 달랐다.


책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의 (정확히는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 때문에 평생을 힘들었던 딸은 아비의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와 관련된 각각의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사회주의자인 형이 자랑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술에 찌들려 살았던 작은 아버지,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 탓에 육사 입학이 취소된 길수 오빠, 상주 노릇을 해 준 황 사장과 전복죽을 끓이는 떡집 언니, 삼오동창모임의 아버지의 사람들. 어느 장례식장에서나 흔히 보이는 울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때로는 감사하는 모습들이 어지러이 뒤섞이며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마치 한국의 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으로 뒤바뀐다.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풍경 속의 아버지의 모습은 다채로울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원망스럽던 아버지가 실은 이웃들에게는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친절한 이웃이었다는 게. 그럼에도 도움을 받은 이들 중 누구 하나 막걸리 한 통 들고 오는 이 없어도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 며 껄껄 웃고 말았다는 게.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장례식장에서 듣고 떠올리는 게 뭔가 아련하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고. 상복을 입고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인공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사실 이는 굳이 한국 근현대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어가며 알게 되는 우리 부모, 아니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 군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았고, 언제나 슈퍼맨 같았던 '사람'이 사실은 고집과 아집에 주어진 온갖 기회들을 내던지고 살았다는 걸, 또 한편으로 그렇게 이기적으로 보였던 이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고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는 것이 '사람'이었다는 걸. 고상욱 씨의 혼잣말처럼 긍게 사람인 것이며,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삶의 풍경이 우리네 세상임을 우리게 들려준다.


어쩌면 대단치 않았던 인물의 생애를 톱아보며,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긍게 사람이제'라는 고상욱 씨의 혼잣말이 어지러이 떠올랐다. 평생을 미워한 사람도, 평생을 사랑하며 고마워한 사람도, 지금도 내 옆을 스쳐가는 수많은 그냥 사람들도. 긍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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