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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고아빠 Dec 30. 2023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김민철 저

이삿짐을 쌀 때마다 처치 곤란인 편지함이 있다. 초등 아니 국딩때부터 곱게 모아온 편지들이다. 이미 30년이나 지나버린 편지들도 있는데 희한하게 그 편지지를 보는 순간 그 편지를 받던 순간의 장면이 하나하나 새롭게 떠오른다. 그날의 온도, 습기. 그 편지가 전해지던 손길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이번에는 버려야지 하다가도 그 날이 떠오르면 결국 그 박스는 고스란히 새 집으로 또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곤 한다. 언젠가 이 박스를 또 꺼낼 날이 와도 나는 차마 이것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어느 책에서 결혼식에서 어떤 드레스를 입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신혼여행 첫날 새벽 호텔 창문을 열었을 때 해가 떠오르는 이국의 풍경은 하나도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나더라는 글을 읽었었는데 정말 나도 그랬다. 암스테르담의 미술관과 호텔이 함께 있던 독특했던 호텔, 새벽 어스름할 때 그 호텔문을 밀고 나왔을 때의 공기, 거리에서 오늘의 장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말소리, 처음 보는 트램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던 순간의 정취.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진즉에 글로 남겨두지 못한 게 답답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도 사진이 있어 가끔 그 순간을 꺼내본다.

처음 묵은 암스테르담 호텔(좌) / 그 새벽 암스테르담 중앙역 앞 트렘(우)

책은 그런 나와 달리 그 결정적 순간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남긴 기록이다. 에세이라지만 편지이고, 그 편지 안에는 둘만의 이야기가,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가득 담겨있다.


희한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 편지를 썼을 때의 풍광은 이랬을 것 같다고 상상했는데 딱 그 풍경이 글 뒤에 사진으로 이어져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글과 썩 잘 어울렸고, 가장 좋았던 순간을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다는 작가의 이런 편지를 받는 이는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순간을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의 오롯한 진심을 고이 접어 고스란히 당신 손에 쥐여주고, 과거의 따스한 온기 앞에 지금의 저를 데려다 놓고 싶었어요. 그곳의 공기와 햇살과 바람과 미소와 나무를 잊지 않도록. 여행이 사라진 시간에도 우리의 여행이 계속되도록.

_ 프롤로그 「먼 시간, 먼 곳에서 부치는 여행」 중에서


책을 읽으며 계속 지난 여행 사진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제는 오래되어 어렴풋이 존재하는 사진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리운 공간도. 그 사진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자꾸만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진짜 모든 것이 좋았어’ ‘이때는 비가 갑자기 왔어’ ‘이때 지하철 놓쳤잖아. 나 비행기도 놓치는 줄’ 


행복했구나 나.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을 줄여 여행’이라 부르는 손발 오그라드는 카피의 주인공이 이 책의 작가님이다. 그리고 그는 그 행복을 찾아보기를 우리게 권한다. 자신의 몫의 희망을 찾으라고 :)


오랜만에 따땃하고 기분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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