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만드는 법 | 이지향 저
1. 한동안 바빠서 못 보던 디즈니 플러스의 마블 드라마를 몰아보는 중이다.(다쳐서 집에 드러누운 김에 그간 못 본 드라마 다 몰아보는 중, 마블 좋아하시면 왓이프는 꼭 보세요 와..) MCU라는 거대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마블의 행보는 늘 즐겁다. 엔드게임으로 페이즈3이 끝나며 마블이 끝났다는 평가도 있지만 코믹스부터 챙겨보던 마블 팬의 입장으로 대형 히어로에 가려진 이들이 작지만 다시 살아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사실 나는 즐겁다.
2.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나는 대학교 때 처음으로 들었다. 사실 그때는 세계관의 의미는 세상을 보는 눈이라는 뜻이었다. 진보냐 보수냐, 어떤 종교적 철학적, 기준에 의거하여 세상을 대하느냐를 판단하는 철학적 용어였는데 어느 순간 세계관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떤 이야기를 구성하는 어떤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는 누구나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쓴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예능이나 아이돌들도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스토리텔링 앞에 영화적 문법, 현실성, 인과관계 같은 규칙들은 의미 없다. 잘 만든 세계관은 캐릭터와 이야기만으로 모든 걸 삼켜버린다. 사람들은 이 세계관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마블을 레퍼런스 삼아 이제 모두가 세계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
3. 유유출판사의 책이 좋기도 하지만 잘 손이 가질 않는 건, 그 사소한 그림 하나 없는 갱지 느낌의 글만으로 빡빡하게 채운 지면에 정말 정직하게 책 제목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만으로 꽉꽉 채우기 때문이다. 이 책도 딱 그랬다. <세계관 만드는 법>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세계관에 대해 설명한 후 세계관을 구성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계관을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캐릭터 세계관은 감정이입, 동질감, 행동의 의외성, 개성 등이 포함되어야 하고 시공간 세계관은 개연성, 확장성, 완결성 그리고 톤앤무드로 맞춘 세계관에는 현실성, 냉소적, 복고주의 등이 드러나야 한다는 등의. 두어 시간 만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로 책은 영화나 문학수업에 나오는 스토리텔링 교재에 나올법한 이야기를 꽉꽉 채워 우리에게 들려준다. 당신이 만약 작가나 스토리텔러라면 그의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
4. 엑소라는 그룹이 처음 등장했을 때 우연히 리모컨을 돌리다 음악방송에 멈추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새로운 보이그룹은 각자 자기를 소개하며 누구는 불, 누구는 물을 다루는 능력자라 소개했다. 그리고 누군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저는 어떤 능력이 있어요’라고 말하며 떨리는 그의 눈동자를.
그리고 ‘야 들었냐? 쟤가 어떤 능력이 있대 ㅋㅋㅋㅋ’하다 결국 쟤는 그런 능력이 있는가 보다. 하고 쿨하게 인정해 버리는 우리를. 실제로 그가 그런 능력이 있건 없던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이야기들이 우리를 즐겁게 하면 그만인 것을. 하긴 시대를 휩쓴 부케 열풍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유산슬이 유재석인 걸 알지만 우리는 그에게 트로트 신인상을 안겨주었다.
5.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사람들은 왜 이 세계관 놀이에 심취할까.
잘 만든 세계관은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깁니다. 그래서 계속 생각이 나는 거죠. 이 세계관을 다른 곳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이 세계관으로 전혀 다른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 순 없을까? 어떻게 하면 이 세계관이 잊히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작품과 그 작품의 세계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것이 꼭 내가 접한 포맷으로 되어있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때때로 슈퍼IP 라는 것은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끊임없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부풀려질 때도 있는데요. 콘텐츠 팬 입장에서 보면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p.153)
6. 철저하게 이 세계에 발 담그고 있는 나지만, 나도 어떤 세계관을 만들거나 누군가의 세계에 편입되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재밌는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더 즐겁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