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2021, 넷플릭스
(스포 주의)
먼저 이야기하자면 넷플릭스에서 제작된 이 아홉 편으로 구성된 드라마는 굉장히 그로테스크하다. 최소 몇억에서 몇십억의 빚에 쫓기는 이들, 소매치기, 살인자, 사기꾼 등 갖가지 이유로 세상의 끝으로 몰린 참가자들은 어떤 게임에 초대받는다. 상금은 무려 456억. 참가자 1인당 1억의 상금이 걸린 줄 알았던 6가지의 소꿉놀이는 실제 참가자들의 목숨 값이기도 하다.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아름다운 놀이들이 피로 물들어 가면서 참가자들은 선택해야 한다. 상대를 죽일 것인지, 이 게임을 포기해야 할 것인지.
지옥은 어디에나 있다 : 자본주의의 민낯
직업도 없고, 이혼당하고 하나뿐인 딸도 빼앗긴, 하는 거라곤 어머니 쌈짓돈으로 경마 놀음하는 것이 전부인 74년생 기훈(이정재)은 오지랖만큼은 세계 최강이다. 기훈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서울대 경제학과 수석의 상우(박해수)는 쌍문동이 자랑하는 천재이자 외국 출장을 밥먹듯이 다니는 애널리스트다. 물론 지금은 60억의 투자 실패로 온 가족의 재산을 저당 잡히고 쫓기는 신세다. 이밖에도 엄마를 북에서 데려오기 위해 소매치기로 전락한 탈북자, 조직에 배신당한 깡패, 월급 떼이고 손가락도 잃고 아내와 함께 이 땅을 탈출하길 원하는 외국인 노동자, 여성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거라곤 몸 파는 일과 사기 밖에 없는 사기꾼, 뇌종양으로 죽을 날 받아놓고 홀로 남겨진 등 다양한 서사를 가진 실패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한번 게임을 포기한다. 지옥에서 세상으로 잠깐 돌아온 듯했으나 그들은 곧 깨닫는다. 지옥은 게임장이 아니라 바깥임을. 오히려 목숨을 걸고 번호표 붙이고 벌이는 게임의 규칙이 더 단순하고 더 가능성이 높은 게임이었음을. 세상은 약한 자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음을.
평등 : 신기루 같은 그 어떤 것
게임을 진행하며 스텝들이 기계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이곳은 평등한 곳이라고. 남녀노소, 있는 자 없는 자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규칙 아래 게임을 진행하여 이기는 자만 살아남는 곳이라고. 실제 모든 게임은 참가자에 따른 어떤 어드밴티지도 부여하지 않는다. 건장한 남자들로 구성된 팀과 여자와 노인들이 섞인 팀이 줄다리기 시합을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 과정만 평등하다면 어떤 결과도 평등하다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게임은 그대로 가져다 쓰며 평등을 말한다. 이는 출발점이 어디든 상관없다. 당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 게임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시합일지라도, 그들은 늘 평등했다고 말한다.
잠깐 게임을 떠난 모든 이들은 거의 다시 돌아와 본격적으로 게임에 참전한다. 여기서 게임을 주최한 이들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생긴다. 형을 찾기 위해 숨어든 형사 하나는 스텝으로 위장해 거의 모든 시설을 헤집고 다닌다. 기계처럼 보였던 스텝들도 총부리를 겨누자 살기 위해 가면을 벗었고, 또 스텝 중 어떤 무리는 어떤 이들은 참가자 중 의사 하나를 포섭해 탈락자의 장기를 내다 팔 기도 했다.(드라마 초반, 뭐든 아는 것 같았던 조직은 상우의 숨겨진 빚을 찾지 못했다) 마치 기계처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던 조직도 결국 인간에 의해 움직였고, 돈에 미친 인간의 욕망은 통제되지 못한 채 엉망으로 내달렸다. 결국 이 스텝들은 프론트맨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 이유는 이들의 비위가 아니었다. 게임의 룰, 즉 평등을 흐트러뜨렸다는 대가였다.
프론트맨은 정말 평등을 시스템으로 통제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건 결국 힘과 돈이다. 이 힘은 잠깐이며, 평등은 인간의 욕망 아래 눈 녹듯이 사그라들었다.
그들에게만 보이는 희망
결국 모든 게임은 끝나고 기훈이 최후의 생존자가 된다. 그는 정말로 456억이 입금된 통장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일 년 동안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한다. 고작 만원을 찾았고, 그 돈을 고등어 집 할머니에 전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그 만원을 은행장에게 빌려 채워 넣는다.
게임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던 게임의 지배자 호스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기훈을 부른다. 그리고 살기 위해 흔들렸던 기훈의 양심을 까뒤집어 보인다. 결국 너도 똑같은 인간임을. 호스트는 또다시 게임을 제안한다. 저 밖에서 죽어가고 있는 남자가 오늘이 가기 전에 구조되겠느냐고. 아마도 같은 질문을 받았을 거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드라마 안에 존재한다. 이전 시즌의 게임에 우승했음에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고시원에서 은둔했다던 경찰의 형. 지금은 프론트맨이 된 그 사나이도 지금의 기훈과 동일하게 괴로워했을 것이고 아마 이 마지막 게임에서 호스트에게 져 게임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호스트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아마 그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훈은 보았다. 자정이 되기 전 누군가가 술에 취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이를 구하러 왔고, 그는 구조되었다. 기훈은 비로소 오징어 게임에서 빠져나온다.
비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드라마의 비현실성에 대해 지적하는 짤을 보았다. 일단 대한민국에 총 수십 자루를 소지한 집단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 이미 드라마는 대놓고 판타지다. 하지만 판타지 이면에 보이는 돈과 사람의 이야기, 이 슬픈 이야기는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를 적확하게 대변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자가 편을 나누고, 너무 많이 가진 자는 빅브라더가 되어 가지지 못한 자를 게임의 말로 여기는 시대. 못 가진 이들의 가지고 싶은 욕망은 결국 내부에서 연대를 무너뜨리고 각자도생으로 또 한 번 가진 자들에게 배신당하는 시대. 겪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드라마는 아이들의 게임을 빌어 보여준다. 사실 피칠갑된 운동장보다 이 현실이 제일 그로테스크하다.
영화의 마지막 기훈은 이 거지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는 공항 지하철에서 자신의 일 년 전과 같은 남자를 보게 된다. 고민하는 기훈에게 프론트맨은 마치 지켜보고 있다는 듯 '가던 길 가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하지만 기훈은 그에게 맞서기로 한 것 같다.
아마 시즌2는 오징어 게임의 두 우승자. 기훈과 프론트맨의 이야기가 되겠지. 오래간만에 몰입감 최고의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