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스>
마블 시리즈에 꽤 진심인 편이다. 현존하는 마블 영화는 모두 두 번 이상 보았고, <아이언맨3> 이후로는 개봉일 +2일을 넘긴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 <이터널스>는 개봉하고 두 주가 지나서야 극장을 찾았다. 아마 무료 쿠폰이 없었다면 디즈니플러스에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언제부턴가 많아도 너무 많아져 버린 히어로들의 세계에 지친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마블리가 나온다지만 10명의 모르는 히어로가 떼로 등장하는 영화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스포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개봉 이후 영화가 재미있다, 없다를 두고 꽤 논란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영화 곳곳에 뿌려진 떡밥과 재미에 관해서는 이미 유튜버들이 실컷 풀어놓았으니 굳이 나까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만 영화는 몇 가지 내 상식을 깨어놓았는데 이 글은 그 상식의 깨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1. 백인 히어로 시대의 종말
마블은 원래 처음부터 빅네임을 캐스팅하지 않는다. 어벤져스도 스칼렛 요한슨 정도를 제외하고는 빅네임은 없었다. 마블과 함께 성장한 거지. 그런데 마블에 앤젤리나 졸리라니. 와, 당연히 주인공은 졸리님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의 시작과 함께 롭 스타크(왕좌의 게임 주인공)가 슈퍼맨이 되어 오더라! 와.. 이건 보나마나 당연히 이카리스와 테나의 투톱 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가장 인지도 있는 두 백인 남녀 중 하나는 조현병을 가진 히어로, 하나는 마지막에 빌런으로 변신한다. 꽤 신선했다!
2. 소수자의 이야기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목격한 히어로의 면면은 생각보다 다양했다. 백인, 동양인, 흑인, 인도인, 아이, 청각장애인, 동성애자, 조현병 환자. 아니 이들은 인간이 아니니 `인`자는 빼도록 하자. 어쨌거나 세상의 거의 모든 이들을 모아 놓은 듯한 히어로 집단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연스러웠고, 좋아 보였다. 저게 가능한 신이구나. 4인 백인 가족이 아니어도 만들어 내는 다양한 이들의 저녁 식사, 그 하모니가 내겐 꽤 즐거웠다. <어벤져스 : 엔드게임>의 마지막 전투신 중 여성 히어로들이 모이는 샷이 있는데 마블은 모든 영화에서 이 노선을 정했다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다. 이전에서 디즈니의 백인 중심 가족주의를, 순혈주의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뭔가 마블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 같기도 하다.
3. 누가 빌런인가?
언젠가부터 마블 영화는 빌런과 히어로의 경계가 애매해져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이터널스의 본 탄생 목적인 데비안츠가 빌런으로 보인다. 그들도 셀레스티얼의 창조물이었으나 창조단계의 실수로 진화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셀러스티얼을 피해 지구로 내려온다. 이터널스는 그 데비안츠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왔지만 데비안츠를 잡다 보니 인간의 수가 적정선을 넘어서는 순간 지구는 티아무트에 의해 멸망해야 하는 운명임을 이터널스는 알게 된다. (오히려 인간을 죽이던 데비안츠와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가 인류의 멸망을 막고 있었다) 이때부터 빌런은 티아무트과 그의 계획을 수호하려는 이카리스로 바뀐다.
4. 나만 에바를 떠올렸나?
일단 티아무트 비주얼은 그냥 봐도 에바와 흡사하다. 데비안츠가 그냥 지구에 내려와 인류를 학살하는 것도 사도의 시퀀스와 비슷하고 마지막에 티아무트가 바다에 반만 걸쳐 얼어버리는 장면은 <엔드 오브 에바>의 레이 얼굴과 똑같다. 이머전스라 불리는 인류를 싹 죽이고 새로 시작하자는 계획조차 에바의 서드임팩트, 인류보완계획과 완전히 똑같음. 에반게리온 역시 인류를 지키는 총 사령관인 네르프의 수장이 결국 빌런이었다!
<이터널스>는 2시간 37분이란 만만찮은 런닝타임을 지닌다. 물론 캐릭터의 소개들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그만큼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블은 아이언맨과 미국대장, 미국 국적을 가진 백인 남성을 넘어 새로운 히어로의 도래를 계속해서 알리고 있다. 사실 이 변화만으로 즐겁다. 바라기는 마블리를 여기서 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돌아와 마블리!!
*드루이그 역으로 출연한 베리 키오건은 22년에 <배트맨>에도 나온다던데 아무리 그래도 DC와 MCU를 넘나드는 건 너무 세계관 파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