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동화
헤르만 헤세가 쓴 동화라니, 그것만으로도 책을 펼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고 또 한참을 멍했다. 쉬워보이는데 은유로 가득찬 글을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제목처럼 <동화>같은 이야기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사랑, 죽음, 삶, 소원, 예술 등 우리네 삶 이면의 모든 부분을 다루면서도 어떤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두드린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책의 문을 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랬지만 <파르둠>을 관통하는 질문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는 꽤 여운이 길었다. 만약 이야기 속의 사내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 묻는다면 나는 무어라 답할 것인가? 몇가지 가상의 대답을 해보았는데 성에 차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소원은 진짜 나의 것인가 아니면 흘러가는 세계에 휩쓸려 잠시 품게 된 헛된 바람일 뿐인가.
이후 이야기의 전개는 더 생각할게 많아진다. 마지막 남겨진 이의 소원으로 산속에 파묻혀 버린 도시.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역사에 모든 것을 품은 산은 자신이 결국 자신도 소멸된다는 것을 느끼며 몸서리친다. 한때 여름의 불꽃이 타오르던 골짜기, 사랑에 젖어 노래하고 걷던 젊은 이들의 풍경을 떠올려보지만 결국 무너져내리는 산. 시절은 바뀌었고, 사람들은 사라졌고, 남은 건 다만 자신이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쓸쓸한 감정뿐이다. 변화는 늘 그렇게 찾아온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하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이런 은유가 책 곳곳에 묻어있다. 이를테면 <험난한 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한발한발 나아가는 길 안내자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노래를 부른다.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아마 100년은 더 된 이야기일텐데 이 노랫소리가 오늘도 SNS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일까. 모두가 매일 열심히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지만 과연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애써 박자를 맞추고 억지로 걸음을 옮기는 그 여정은 정말 의미가 있는가. 만약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또 무엇일까.
작은 꽃 한 송이도 자기 자리에 피고 지는 것이 허락되는데 왜 인간은 자꾸만 어디론가 밀려가야 하는 걸까. 아니 왜 자꾸 가려고 하는가. 헤세의 질문은 꽤 강하고 단단했다.
이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처럼 판타지와 모험을 다루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 대신 부른 노랫말에 맞춰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꽤 쉽게 읽힐거라 생각했는데 마음이 꽤 요동쳤고 이내 잠잠해졌다.
*해밀누리라는 출판사는 처음 알았는데 라인업이 꽤 단단하다. 자주 찾아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