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사이토 고헤이 저
`20대에 맑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이고, 40대가 되어 여전히 맑스에 빠져 있으면 바보`라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물론 이는 나를 포함한 일정 세대 이전의 청년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맑스에 관심이 아예 없다. 물론 금융위기 이후 `맑스`가 재조명되고 맑시즘이 사회문화 전반에 새로이 불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기후 위기에도 맑스가? 사실 제목부터 좀 새로웠다.
모든 종교인의 공분을 산 선언. 맑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선언했다. 종교는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현실 너머 하늘로 도망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기후 위기에 직면한 인류에게 이 발언을 빌어와 `SDGs는 대중의 아편`이라 선언한다. 어? 사실 좀 아연 질식했다.
* SDGs는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를 뜻하는 말로,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시행되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공동목표이다. 빈곤, 질병, 교육, 환경 등 다양한 영역에서 17가지의 주목표와 169개의 세부 목표를 세웠으며 국제사회와 NGO는 이에 발맞추어 인류 공통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미 인류는 비인간화 등 자본주의의 폐해로 일어나는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국가는 복지제도를 만들고, 국가 단위로 해결 불가능한 이슈는 국제사회가 중심이 되어 SDGs같은 공동의 약속을 만들어 냈다. 물론 제도라는 것이 완벽하지 않기에 시간이 걸리고, 행정상의 실수로 소외되는 이들이 있겠지만, 대부분 정치인과 행정가들은 시간을 들여 제도를 보완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후 위기에 관한 한 이러한 모든 시도에 앞서 단호하게 말한다. 케인스주의를 표방한 `녹색 성장`, `그린 뉴딜`같은 건 한마디로 개소리라는 거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없다. 지구의 온도는 이 순간에도 높아지고 있고, 오늘 당장 공장을 멈추지 않으면 해결할 내일은 없다고 말한다. 텀블러, 에코백 사용 같은 지엽적인 행동으로 내가 오늘 환경에 기여했다고 뿌듯해 할 것이 아니라, 성장 일변도의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단언한다. 자본주의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에 `지속 가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따위의 자기모순이다. 자본주의는 타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저자는 꽤 긴 페이지에 걸쳐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기후 위기를 가져온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설명한다. 최근 핫해진 브랜딩에 대해서도 그는 `상대적 희소성`을 만들어 내는 것 이외에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일갈한다. 다르고 싶은 욕망에 의해 구입한 어떤 것은 곧 낡은 것이 되고, 유행의 반복에 의해 우리의 욕망은 잠깐 스쳐 지나갈 뿐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다름`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노동으로 내몰린다. 욕망도, 감성도 결국 자본에 포섭될 뿐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과도한 포장과 쓰레기로 치환된다.
이러한 악순환의 대안으로 저자는 맑스를 다시 소환해 낸다.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자율적, 수평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인 탈성장 코뮤니즘, 그렇다고 그가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의 부활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이 하나씩 생겨나는 협동조합을 그는 코뮤니즘의 좋은 예로 들며, 커먼(공동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의 폐해가 단지 비인간화 뿐 아니라 기후 위기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저자의 문제 제기는 일견 정당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 코뮤니즘, 자본의 해체가 과연 현실 가능한 담론인지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지점이 많다. 케인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부분을 약간 가릴 수 있지만 해결할 수 없다. 일견 동의하지만 그것 말고 지금 우리가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또한 문화의 성장에 따른 브랜드의 성장이 욕망에 따른 `상대적 희소성`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인가?
흥미로운 논쟁적인 책이 나왔고, 이 논의가 조금 더 논의가 나아가길 바라본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사이토 고헤이 저 / 다다서재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