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편의점> 정호연 저
어릴 적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는 제일 큰 슈퍼마켓이었다. 이름도 <민혁쌀상회> 어머니는 슈퍼, 아버지는 퇴근 후 쌀과 연탄배달을 하셨고 나는 주로 슈퍼 앞 커다란 평상에서 손님을 맞았다. (꼬맹이인 나도 엄연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가계 전선의 한 축이었다는 걸 그땐 몰랐다) 하여튼 나는 늘 그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어른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스토퍼가 되었고, 말동무가 되었다. 한창 바쁘게 지나가던 분들도 슈퍼집 꼬맹이가 덩그러니 앉아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뻤는지 한마디라도 붙여주시고, 슈퍼에 뭐라도 사서 내 손에 쥐여 주시곤 했다. 난 늘 엄마에게 뺏기기 전에 그것들을 입으로 욱여넣었고, 그 모습도 그렇게나 예뻐 보였나 보다. 우리 집 앞 평상은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내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시간이 흘러 슈퍼라 이름하는 건 다 대형체인이 되어버렸고, 그 옛날 슈퍼도 그 앞에 놓인 평상도 사라져 버렸다. 이젠 평상을 지키고 있는 아이도 없고, 그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쥐포 따위를 쥐여주던 어른도 없다.
서울역 인근의 좁고, 오지랖 넓은 북극곰 같은 야간 점원이 있고, 없는 게 더 많은 불편한 편의점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편의점은 참 온갖 인간의 군상들이 스쳐 지나는 곳이다. 백화점처럼 가진 사람만 오는 곳도 아니고, 무료급식소처럼 없는 이들만 모이는 곳도 아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어떤 이는 입가심할 껌을 사러 잠깐, 어떤 이는 끼니를 때우러, 어떤 이는 복권을 사러, 또 어떤 이는 급한 생활용품이나 의약품 따위를 사러 편의점에 들른다. 요즘은 테이블을 잘 갖추어 놓은 곳도 꽤 많아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를 먹는 카페가 되기도 하고, 4캔 만원 맥주의 썩 괜찮은 술상이 되기도 한다.
소설 속에 인물들은 다 이 편의점을 스쳐 지나는 군상 중 하나다. 서울역 노숙자, 취준생, 소주 한잔 기울일 곳 없는 40대 가장, 게임중독 아들을 둔 어머니, 가출청소년, 소설을 쓰는 30대 무명 작가 등 우리 주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이들은 모두 편의점에서 오지라퍼 `독고` 씨를 만난다.
대단치 않은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모두의 삶은 그곳에서 받아들여지고, 공감되고, 회복되기 시작한다. 가장 큰 아픔을 가진 독고 씨는 이 모든 군상의 이야기를 몸으로 받아낸다. 그리고 함께 옥수수수염차를 마셔준다. 그 차가 너무 따듯하고 고마워 눈물이 났다. 누구를 가리지 않고 건네는 사람 냄새가 그리워 마음이 저렸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냄새 가득한 이야기다. 편의점 맥주에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그 사람 하나면 살만할 텐데 싶은 밤. 오늘 딱 그런 밤이다.
TMI.
대학 시절 편의점 야간알바를 꽤 오랜 시간 했었다. 편의점의 밤은 길다. 물건이 들어오고, 검수하고 진열한다. 낮 동안 모인 음식물 쓰레기를 치워야 하고, 이따금 술에 취한 JS(진상)들을 어느 시간보다 많이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새벽.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물건을 사러 온 게 아니라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30분만 이야기를 좀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얼떨떨했지만 손님도 없는 시간이라 그러자고 테이블에 앉았다. 남자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는 내 앞 타임 누나의 전 남자친구였다. 듣자 하니 이 누나가 요즘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들며, 혹 누나와 친하다면 같이 다니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느냐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난 앞 타임 누나와 교대금액 말고는 단 한 마디 나눠본 적도 없다. 같이 다니는 남자가 아니라 누나의 이름도 연락처도 몰랐다. 미안하다며 맥주 한 캔을 건넸다. 말없이 한 캔을 비워낸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고맙다고도 했다. 맥줏값을 계산하려 했으나 그냥 돌려보냈다. 왠지 맥주 한 캔 정도는 사주고 싶었다.
이후 그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누나도 곧 알바를 그만두는 바람에 물어볼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난 이 일이 참 좋았다. 글쎄. 누군가를 마음속으로만 좋아했던 언젠가의 내가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불편한 편의점 / 정호연 저 / 나무옆의자 /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