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기록 | 존버거, 장모르 저
<급류>의 작가 정대건은 창작자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매일 보던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 앞에서 다시 멈춰 설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위해 이 책 <세상 끝의 기록>을 권한다.
어떤 콘텐츠를 분석하거나 해석하기 이전의 시선, 무언갈 알아서 설명보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경탄이 먼저 터져나오는 상태 말이다.
이 책은 여행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보다, 잊고 있던 어떤 것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라는 건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를 다시 바라보는 나의 시선의 변화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행으로 저자들은 우리를 안내한다.
책은 다큐작가 장 모르가 세상의 변방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과 존 버거의 글을 함께 엮은 책이다.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장 모르의 사진은 그 대상으로부터 늘 한 걸음 물러나 있다. 그는 지나치게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찍이 도망치지도 않는다. 이 미묘한 거리는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을 그냥 스쳐가는 소비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지구 어느 곳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삶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늘 이방인의 시선이 담겨 있으면서도 따뜻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설명하기 힘든 그리움 같은 감정마저 은근히 배어 나온다.
그의 사진을 설명하는 존 버거의 글은 그 감정을 확대하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그 사진 속에 가만히 서 있을 공간을 만들어준다.
흥미로웠던 건 그의 여행지 중에는 평양도 있다. 잘지내고 떠나기 전 사진을 많이 빼앗겼다고도 기록되어있는데 그래서 몇 장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괜히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다. 가까이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라. 이 사진에 담겨 있는 이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기억으로 미끄러진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통해 문득 오래전 내가 살던 골목의 공기와 냄새, 함께 뛰놀던 이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 얼굴들을 떠올리다 보면 이제 이 사진들이 정작 어디서 찍혔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게 된다.
작가의 카메라가 머물던 그 시간과 장소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계속 되짚어 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 끝의 기록>은 여행기나 사진집으로 퉁치기는 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존버거도 장모르도. 대가의 이야기는 확실히 다르다.
좋은 책이 늘 그렇지만 이 책도 한번의 호흡에 다 읽기에는 생각할게 꽤 많다.
그리고 우리가 다녀올 기억 속의 그 장소도 꽤 많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주 먼 곳까지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매일 보던 풍경인데도 무언가 낯설게 느껴졌는데 그 낯섦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세상 끝의 풍경. 이 책의 제목이다. 낯설지만 반가운 공간.
당신에게 세상 끝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구 반대편의 황량한 풍경일 수도, 이미 지나온 삶의 어느 평범한 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면. 그래서 오늘 당신의 삶을 좀 더 새롭게 보고 싶다면,
그리고 천천히 읽을 책을 원한다면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