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피해자인가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박정훈 저

by 짱고아빠

피해자의 자리를 상상하는 시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먼저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차별’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붙은 책을 권할 때면 언제나 약간의 긴장이 따라온다.

누군가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방어하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이미 피로한 얼굴로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면 이 책이 겨누는 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피해자의 자리를 훔쳐 간 남성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저자는 오늘의 청년 남성들이 왜 스스로를 ‘남성 피해자’로 상상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남성에게 남아 있는 역할 기대, 그러나 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워진 노동과 사회 구조.

그 사이에서 생긴 불안과 분노는 어느 순간 ‘여성이 내 몫을 빼앗는다’는 이야기로 번역되고, 그 이야기는 온라인 문화와 정치 언어 속에서 점점 더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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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함이라는 이름의 번역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이 감정을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신 그 감정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더 큰 고립으로 이어지는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디지털 성범죄, 교제 살인, ‘잠재적 가해자’ 논쟁 같은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함께 분노하기보다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를 증명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장면들.


그래서 읽는 동안 조금 답답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이나 피해가 어느 순간 진영 싸움이 되고, 피해자보다 ‘우리 편이 공격받고 있다’는 감정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 상황을 우리는 바꾸어나갈 수 있을까?



혐오의 언어가 만드는 고립


저자는 이런 장면들이 오해가 아니라 이제 하나의 시스템으로 굳어졌다고 말한다.

능력주의와 결합한 혐오의 언어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줄 세우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설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문제는 그 구조가 결국 남성 자신도 더 외롭고 좁은 자리로 밀어 넣는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분노가 삶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고립과 냉소로 이어진다는 것.

책이 계속해서 묻는 질문도 바로 그 지점이다.


정말 그 분노는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했는가.



다시 연대를 상상하라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에 남는 단어, 저자의 추천은 의외로 단순하다. 연대.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누가 더 억울한지 경쟁하는 대신 서로의 삶을 잠깐 상상해 보는 일,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기본적인 사람됨이지 않을까 저자는 물어본다.


그래서 이 책은 남성을 비난하는 책이라기보다, 남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다.

혐오와 경쟁의 언어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고립시키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결국 우리 자신의 삶도 얼마나 좁아지는지를 이 책은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할 질문


책장을 덮고 나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우리는 정말 억울한 것일까.

아니면 익숙했던 어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이 질문에 잠시라도 대답할 마음이 주어진다면 이 책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셈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되는 삶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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