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사유의 시선> 최진석 저
반복해서 말하지만 철학적 지식, 그것은 철학이 아닙니다. 철학은 기실 명사와 같은 쓰임을 갖고 있지만, 동사처럼 작용할 때만 철학입니다.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인 높이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철학이죠.(p.87)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다. 혜자는 위나라 왕에게 큰 박이 열리는 박씨를 얻어 뒤뜰에 심는다. 박은 자라서 쌀을 다섯 섬이나 담을 정도로 큰 박이 된다. 박은 주로 호리병 혹은 물바가지의 용도로만 쓰였는데 혜자가 생각하기에 너무 거대한 이 박은 그 어떤 것으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화가 난 혜자는 이 박을 깨어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장자는 혀를 차며 말했다. '박이 그렇게 크면 배로 만들어 물에 띄워 놀면 될 것 아닌가'
우리는 종종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혜자가 된다. 우리 앞에 사물 혹은 관념의 원래 용도 이외에는 상상하지 못한다. 혜자에게 박은 기존의 관념이었다. 그는 이 관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장자는 관습에 구속되지 않았다. 그는 ‘물바가지’가 아니라 ‘배’라는 새로운 용도를 박에 과감히 덧씌워 버린다. 이것을 우리는 창의력이라고 부른다.
창의력이 결여된 시대라고 말한다. 좀 이상한 상황인데 크레이티브하기 위해 우리는 크리에이티브한 누군가를 찾아가 돈을 주고 배운다. 철학은 창의력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철학자들은 누구를 닮기 위해 살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의 삶을 살았다.
이 책은 철학에 관한 책이고 이러한 철학의 진짜 모습에 관한 책이다. 칸트나 헤겔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외는 것이 아니라 소위 철학이 어떠한 학문인지, 우리는 철학하기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전이자 안내다.
저자는 철학하기 위해선 우선 기존의 관념과의 '단절'이 감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절'이 있어야 이후 새로운 '연결'이 가능하기에 단절의 과감함이야말로 창의적일 수 있는 능력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관념을 단절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고는 일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철학은 다분히 전복적이다. 소위 철학하는 이들은 고분고분하지 않다. 늘 도전적이고 야성적이다. 그래서 창조적 탁월함은 늘 불편하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왜 생각은 꼭 합리적이어야 하는가? 왜 새로운 것들은 꼭 기존의 것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좀 불편하고 모나더라도 한 번 도전할 수는 없을까? 철학하는 이들은 이렇게 기존의 세계를 파괴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가 그랬다. 그는 믿음의 세계에서 이탈해 최초로 생각이라는 것을 시도한 사람이었다. 신의 분노를 달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생각하고 대안을 제시했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도 무수히 일어난다. 컴퓨터 게임에 밀려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레고는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에서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을 바꾸고 새로운 기업의 활로를 찾았다. 데이터와 레퍼런스에 치여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서 그래프와 지도를 과감히 치워버리고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길, 세상에 없는 지도 밖으로 행군했던 이들에게 기회는 주어졌다.
저자는 여기 더해 직업을 대하는 자세에 관해 이야기한다. 공무원 응시자가 정부청사에 들어가 자신의 성적을 고친 일이 있었다. 충격적인 것은 범인은 창문을 넘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당당히 문 아래 작게 적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사무실 인력들에게 왜 그랬느냐 물어보니 요구르트 아줌마 편하라고 적어놓은 번호라고 한다. 아마 경우는 다르겠지만, 우리도 이 같은 경우를 제법 만날 것이다. 출근해서 마셔야 할 책상 위의 요구르트는 중요하지만, 회사의 기물은 중요하지 않은 사회, 퇴사하면 그만이기에 직보다 내가 우선인 사회,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어떤 것보다 가볍고 즐거운 삶이 더 힙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물론 내가 가장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나의 직에 대한 책임감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들, 직에는 관심이 없지만 업은 지나치게 등한시하는 이들, MZ, 워라벨 따위의 트렌드에 맞추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우리는 다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진지하게 묻는다.
오랜만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책을 만났다. 진짜 삶이란 어떤 삶일까? 철학전공의 한 사람으로 이런 멋진 선배를 만나면 마음이 좋다. 간만에 누군가에서 선물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 최진석 저 / 21세기북스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