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시대> 노리나 허츠 저
정말 오랜만에 각 잡고 읽은 책이다. 더 꼼꼼히 봐야 할 것 같고, 더 밑줄 그어야 할 것 같고 행여 놓친 부분이 있을까 두 번 세 번 읽었다. 어쩌다 새해부터 이런 책을 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바 대 SNS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에 정확히 비례하여 이 땅에 외로움의 시대는 도래했다. 아이폰이 등장하던 2010년부터 우리는 더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정확히 10년 뒤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집에 가둔 순간부터 그 외로움은 폭발하기 시작했다.(런던, 뉴욕, 파리, 시드니, 홍콩, 두바이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우리 도시는 살기 외로운 곳'이라고 응답했다) 사실 코로나 이전부터 이 외로움은 SNS와 만나 분노와 민족주의 혹은 인종, 여성, 성소수자 차별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이를 기가 막히게 이용한 마케터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에서는 외로움이 AI와 로봇기술과 만남으로 더 이상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필요로 하지 않은 세상의 도래를 예고하기도 했다. 외로움에 휩싸인, 더 정확히는 자존감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인간은 더 이상 인간과의 관계(정확히는 그에 수반되는 갈등과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원하는 대로(아마도 순종적인) 세팅된 로봇과 이야기하고, 저녁을 먹고, 섹스를 한다.
우리는 사생활에서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일하는 방식 또한 외로움의 기폭제가 되곤 한다. 코로나로 인해 각광받는 재택근무 혹은 스마트 근무에 대해서도 우리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재택근무로 집에 갇힌 이들의 생산성에 대한 연구는 이미 절망적인 수치로 보고되고 있다. 구글이 조사한 바로는 최적의 재택근무 일수는 1.5일이라고 한다. 직원들이 각자의 방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야 하고 유대를 쌓는 동시에 대면의 심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는 구글의 발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외로움의 세상이 도래하게 된 책임을 보수주의자는 전통적 가족의 붕괴를 가져온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돌리고, 좌파는 정부의 오히려 공동체를 보살피고 사회적 질병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의 역할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정확한 이유는 더 따져볼 일이지만 이 고립의 시대에 우리는 비로소 '외로움의 경제'를 목도하고야 말았다.
돈을 주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예전에는 피치 못할 일(결혼식 하객 알바 같은) 혹은 성매매와 관련된 곳에만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오늘 정말로 우리는 저녁식사만 함께해 줄 사람, 두 시간 동안 데이트해 줄 사람 혹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돈을 주고 주문한다. 그리고 점점 이는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치킨이나 피자를 주문하는 것처럼 사람을 주문하고 그를 통해 잠시나마 외로움을 풀어낸다. 그리고 아마 이는 머지않아 꽤 큰 산업으로 성장할 것 같다.
이러한 세상의 잘잘못을 논하기에는 이미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한국 사회도 어떻게든 이에 맞춰 변화할 텐데 미국처럼 상담의 문턱이 낮아질지, 정교화 된 AI가 등장해 우리의 친구가 되어줄지, 혹은 미팅 앱(데이팅이 아닌 정말 미팅의 의미)이 국민 앱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지만 어쨌거나 나의 외로움과 마주하여 이 세상을 맞이할 준비는 각자가 해야 할 것만 같다. 적응할지 저항할지 혹은 스마트폰을 접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갈지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읽는 내도록 마음이 떨리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