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짱고책방

마흔에 찾아온 질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 김영하 저

by 짱고아빠


김영하 작가의 글과 그의 삶을 보면 부러워지는 지점이 많다. 그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쓰는 삶을 살고 있고, 자신의 삶에 대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책을 당연히 읽었겠거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시칠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은 없어 내려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지금의 나와 같은 나이에 시칠리아로 떠났고 삶의 큰 결정을 결행했음을 알았다.


1. 오래 준비해 온 대답


그는 PD가 물어 온 '어디로 떠나고 싶냐'라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시칠리아'라고 대답했다. 마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래 준비해 온 것처럼 말이다. 시칠리아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그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여행했는지는 책에 세세히 적혀있으니 여기선 각설하기로 하자. 시칠리아의 풍광에 앞서 내가 꽂혔던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는 마흔에 이미 몇 권의 장편소설을 쓴 작가였고, 국립예술대학의 교수였으며, 괜찮은 라디오 프로그램의 DJ였다. 갖출 것은 다 갖춘 그에게 누군가 떠나겠냐고 묻자, 그는 반사적으로 가겠다 대답한다. 마치 나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고, 누군가 그 안전핀을 뽑아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나이에 13년째 한 직장에서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내게 누군가 같은 것을 물어온다면 나는 무어라 대답할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뉴욕이나 파리의 이름을 댈까, 아니면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그냥 집에서 내 고양이랑 있고 싶어요라고 말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슬프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잃어버린 어느 중년의 사내가 언뜻 비쳤다. 이제 무엇을 원하는지도, 무엇을 욕망하는 지도 애매한 서울과 대구를 오가는 슬픈 직장인. 정작 중요한 것을 다 잃어버린 채 지엽인 것에 마음과 감정을 모두 걸어버리는 한심한 배 나온 아저씨가 내가 비쳤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느낀 시칠라아의 풍광을, 오래 준비해 온 어떤 것을 나도 느끼고 글로 그려낼 순간이 내 생에 한 번은 올까.


2. 나의 늙음


에필로그에서 그는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 이상 어떤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라고.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간의 내가 그랬다. 나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갈구하지 않는다. 평생을 듣던 노래를 듣고, 비슷한 옷을 입는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요즘 것들'과 나는 조금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나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굳이 따라가지 않으려 한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십 대의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혼자 옮길 수 없는 가구는 감히 집에 들이지도 않았으며 언제든 두어 시간 안에 짐을 꾸려 어디든 내 차에 싣고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카메라와 노트북이면 충분했다. 그게 지구 끝이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젊었고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챙길 것이 많아, 며칠 캠핑도 쉬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기에 새로운 것들을 들일 수 없고,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이 많기에 보고 듣는 것을 최소화하는 한심한 인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우리 집 담장 위로 길고양이들이 쉴 새 없이 뛰어다닌다. 신체가 늙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마음은 잡아두고 싶어 한 번도 듣지 않았던 음악을 찾아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본다. 책도 글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떠나고 싶냐'라는 물음에도 쉬할 수 있는 대답도 생각해 볼 양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늙어버리기엔 아직은 내 청춘이 조금 아깝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저 / 복복서가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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