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잃어버린 고양이 주인을 찾아서
늦었다. 늦었다. 하고 엑셀레이터를 세게 밟던 길에 울린 까똑이다.
평소 안부카톡이라곤 단 한줄도 없는 막내가 아침부터 까톡을 날렸을 땐, 이게 다라고 생각했다. 길냥이가 사무실에 들어오는 일이야 가끔 있는 연중행사고, 예쁘게 들어다 살포시 밖에 내놓아주면 도도히 제 갈 길을 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출근해 커피 내리고 뭐하고 하던 찰나 아침에 사진으로 보았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카톡에서 얘기하던 그대로 얌전히, 꼼짝도 앉고, 사무실 문 앞에 예쁘게 앉아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너무 깨끗해 어라 싶었는데 다가가니 더 가관이다. '너 어디서 왔어?'하고 머리에 손대자마자 발라당과 골골송을 함께 시전하시며 냐옹냐옹 거리기 시작한다. 번역할 순 없지만 이 녀석은 마치 내가 어디서 왔거 어떤 사정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부터 니가 나를 좀 돌봐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일단 알았으니. 밥, 물, 박스부터.
급한대로 차에 있는 사료 한뭉텅이 꺼내고, 물에 박스까지 놔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살펴보니 이 녀석 100% 길냥이는 아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을까.
이 경우 잃어버렸거나, 버렸거나 둘 중에 하나인데 가출했다고 추정하자니 어디서 가출했는지는 몰라도 거기서 사무실까지 뚜벅뚜벅 걸어와 드러누웠다기 보다는, 누가 복지관 사무실 앞에 버리고 갔다고 보는게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관리사무실에 고양이 찾는다는 방송을 부탁하고, 고양이 찾는 전단을 붙이고 고양이 카페 몇몇 곳에 주인 찾는 글을 올렸다.
이렇게 행여 주인이 나타날까 싶어 두어시간을 그냥 사무실 앞에 두었다. 복지관 사무실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목욕탕을 함께 오가는 곳이어서 유동인구가 많다. 두 시간 내 박스 안에 얌전히 좀 있는가 했더니 오가는 모두에게 말걸고 애교 시전 중이시다.
(재밌는 사실은 이 녀석 이름은 '나비'가 아닌데도 거의 모든 어른들이 '나비'라고 부른다는 거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본 고양이를 나비라고 부를까?)
물론 모두가 동물을 좋아한다면 다행이겠지만 저대로 뒀다가 넘치는 애교에 누군가에게 해꼬지 당할까, 혹 집사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어디로 튀어버릴까 걱정된 막내 김다은님과 나는 이 녀석을 조금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넓고 박스가 많은 지하강당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볼일도 필요하실텐데 여차하다 서로 곤란하겠다 싶어 예전에 짱고가 쓰던 화장실을 급히 집에서 가져와 함께 가져다 드렸다.
그리고 이 녀석의 진로에 대해 몇몇 직원들과 의논을 시작했다. '범물이'하고 걍 사무실에서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 제일 크지만 여느 어른들이 그렇듯 관장님 이하 리더십들에게는 어림없는 제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이나 상담실 같은데서 복지관 고양이로 키우는 건 어떨까 건의해 볼 생각이지만 씹힐 가능성이 크다.
녀석의 애교에 넘어간 청소하는 할머니와 프로그램 대상자 한 분이 내가 데려가겠노라 나섰지만 고양이를 키워본 적은 없다는 대답에 썩 믿음이 가질 않는다. 그냥 예뻐서 데려가는 거라면 다시 유기될 가능성이 높다.
뽀시랍게 자란 집냥이들이 길에 나오면 길냥이들에 치이고 사람에게 해꼬지 당해 제 명에 못살고 무지개 다리를 건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유기동물보호단체에 넘길까 생각도 해봤는데 한달의 공지기간 안에 입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안락사라고 한다. 태생이 길냥이면 어쩔 수 없는 묘생이겠거니 하겠는데 이건 좀 경우가 다르다. 이까지 생각이 미치니 뭔가 쨘한 마음에 쪼로록 내려가 한동안을 같이 있었다.
마음이 동동거리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얘 삶에 너무 관여하는 건 아닐까. 이 녀석을 이렇게 데리고 있는 것도 기껏해야 삼사일이 전부일테고, 그 며칠이 아마 내가 이 녀석의 묘생에 관여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일 것이다.
이 아이가 며칠 후 또 어느 곳으로 흘러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 혹은 다른 어떤 냥이들과 같이 길냥이로 길들여질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우연히 나를 만나기로 되어있던 것 또한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난 고양이를 싫어해. 라고 심심찮게 말하고 다녔던 20대의 내가 고양이 집사가 되어 고양이 박사가 되어 있을 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누구도 모를 각자의 삶이 있고 타자가 그 삶에 개입하는 범위는 분명히 제한 되어야만 한다. 그게 나를 위해서도 좋고 사실 상대를 위해서도 그러하다. 이런 개똥같은 생각을 하던 중에 내 다리에 붙어 부비부비를 시전하는 이 녀석이 뭔가 더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기적같이 이 녀석의 주인이 마음을 고쳐먹고 이 녀석을 데리러 와주면 좋겠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녀석과 함께했음을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녀석을 건넬 수 있으면 좋겠다. 부디 이 아이의 생사를 걱정 않아도 되는 곳으로만 이 아이의 삶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이 날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