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어른이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이.
복지관에 근무하던 시절, 주로 아동 프로그램을 맡아 운영했는데 게 중 제일 손이 많이 가는 프로그램이 '아동방과 후 교실'이었다. 아이들도 많고 선생님도 많고 하여튼 시끌벅적했는데 어느 날 A의 게임기가 사라졌다. A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마침 B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CCTV를 돌려보니 사라진 B의 손에 문제의 그것이 들려있는 듯 보였고,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 B의 집으로 갔다. B는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더니 이내 울어버렸다. 놀란 토끼눈을 뜬 B의 할머니를 피해 놀이터 벤치에 둘이 앉았다. 한참을 울던 아이는 죄송하다고 그 게임기가 너무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오늘만 가지고 놀다 내일 돌려줄 거라고도 했다. 그래도 너 잘못한 거라고 꿀밤을 콩 때리고 가만히 어깨를 안아주던 찰나, 어릴 적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나의 도둑질이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때, 문제집을 사러 간 문방구였다. 정말이지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집을 사러 갔고 여느 때처럼 계산할 차례를 기다리며 이것저것 구경하던 중에 지난주에 친구가 자랑하던 딱 그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미치코 런던'의 이름을 붙인 4,500원짜리 비닐 다이어리. 갖고 싶었다. 지금이야 커피 한잔 값이지만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4,500원은 한 달치 용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자리에 서서 그 예쁜 다이어리를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계산하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주인아저씨의 손은 돈을 받지만 눈은 내게 꽂혀 있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점점 박동이 빨라져 터져 버릴 것 같은 순간. 딱 한 순간이었다. 나는 교복 안주머니로 그것을 밀어 넣었고 들고 있던 문제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채 문방구를 빠져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태어나 그렇게 뛰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뛰었다. 등 뒤에서 "야!"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그냥 정말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 먹으라는 아빠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방문을 잠갔다. 그제야 교복 안주머니에서 나온 다이어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 심장이 뛰었다.
결국 난 그 다이어리를 비닐 채 책상 맨 구석으로 밀어 넣었고, 그 다이어리는 수능을 치고 책상을 정리하던 중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난 그것을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고, 다시는 이 감정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별일 없이 대학에 갔고 취업을 했다. 그리고 20년의 시간이 지났고 용기를 내 다시 그 문방구를 찾았다. 예전보다 꽤 규모가 커졌고 지금은 일하는 직원도 몇 명 되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아저씨는 여기 사장님이 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계실까. 20년 전 다이어리를 집어 든 그 장소에서 괜히 쭈뼛거리며 볼펜 한 자루를 집었다. 계산을 하려는데 웬 중년 아저씨가 계산대에 서 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오백 원이라고 이야기하며 아저씨는 내가 내민 만원을 받아 들더니 요즘은 현금 내는 사람이 없다며 반가워했다. 거스름돈을 챙기며 옛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는 아저씨를 피해 나는 슬그머니 그때처럼 문방구를 빠져나왔다. 이번엔 " 저기 거스름돈!"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 하고 뛰었다. 그렇게 뛸 생각은 없었는데 뛰다 보니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공터에 앉았다.
만원을 받아 들던 아저씨의 손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으며 옛이야기를 시작하던 이의 시간을 보았다. 서로 말은 못 했지만 분명 20년 전 그때의 내 시간도 그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꽤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일은,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또 한편으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도 다시 예전처럼 믿어주고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어른이, 언제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내게도 있는 것 같았으니까.
시간이 지나 B도 자라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복지관에 인사도 오고 그랬다는데 하필 그 순간에 나는 없었다. 그 녀석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바라기는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으로, 또 누군가의 실수를 가만히 덮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주면 좋겠다. '네 잘못이잖아'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세상에서,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되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