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딱지라는 갑옷 1

첫 번째 잎, 기꺼이 재개발

by 주나함

얼마 지나지 않아, 펭귄 씨는 그간 준비했던 중요한 일이 진행되어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2박 3일간 대부도로 떠나게 됐다. 그 때문에 월요일마다 있던 데이트 일정이 비게 되었다. 허전할 것 같아 일부러 부산 일정을 월요일 출발, 수요일 귀가로 2박 3일 잡았다. 2년간 아르바이트 했던 곳의 매니저님 두 분의 본가가 부산이시기도 하고, 지점을 그쪽으로 옮겨 내려가셨기 때문이었다.

4시 5분, 잠에서 깬 나는 짐을 다시 확인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서울역에서 무궁화호 탑승 번호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새벽임에도 사람들은 많고 시끄러웠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잠시 궁금했다. 졸업 전 썼던 내 소설이 떠올랐다.

5번 승강장에서 무궁화호를 탑승했다. 2호차 19번, 내 자리였다. 자리를 찾아가다 처음으로 ‘카페 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유롭게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쓸 수 있는 테이블과 천장 선반 콘센트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펭귄 씨에게 답장을 보내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종종 견디기 힘들 때, 무궁화호를 타고 어디든 떠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을 대충 싸고 열차에 올라타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창밖으로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 수많은 산들, 정겹게 어우러진 동네들, 무수히 반복되는 풍경… 그저 살아가고 살아있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여행을 간다는 건 설레는 일일까? 부산 여행이라고 특별하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부산에 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MJ 언니, HJ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4년 전, 고난 중에 있을 때 부산을 방문했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어떤 느낌으로 부산을 바라보게 될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결국, 이 여행의 목적은 단순했다. 그저 ‘보러 간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부산역에는 MJ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와주셨다. 내려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데, 이미 기다리고 계셔서 감동과 고마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부산역에서 유명한 빵집이라며 사라다 샌드위치를 건네주셨다. 오후에 가면 구매가 어렵다고 하셨다.

3시에 체크인을 먼저 한 뒤에 온천천으로 러닝을 가기로 했다. 해운대 센텀호텔로 이동 후 짐을 옮기려는데, MJ 언니가 반팔티와 텀블러를 선물로 주셨다. 내 동생 것까지 챙겨주셨다.

내일이 언니 생일이라 나는 무얼 해드릴 수 있을까 계속 고민이 됐다. 부산에는 받으러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 한편이 자꾸 송구스러웠다.

호텔은 특가로 2박 3일, 약 14만 원. 4년 만에 다시 온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직원분께서 특별히 업그레이드 해서 전망을 시티뷰로 잡아주셨다.

전에 왔을 때보다 공간이 더 깨끗해졌고, 신축 같은 느낌이 났다. 무채색 바탕의 대리석에 커튼과 침대, 화장대까지 모두 새 것처럼 보였다.

러닝하러 온 온천천은 정말 좋았다. 동네에 있던 내천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곳을 걷는 내내 펭귄 씨 생각이 많이, 아니 내내 났다. 데려와주고 싶었고, 언젠가는 이 길을 함께 걷고 싶었다. 좋아하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아지고, 사랑하면 함께 걷고 싶은 곳이 많아지는 것 같다.




언니와 대화 중에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너 참 멋있다.”


고백도 그렇고, 연애에 있어서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는 점이 멋있다고 했다. 기독교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는데 나를 보면서 자꾸 궁금해진다고 했다. 내 믿음과 신앙의 삶을 존중해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좋게 봐주셔서 감사했다.

요새 사람 만나는 거 힘들었는데, 나를 만나는 건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다.

“아 너무 편하다”,

“너무 좋다”

만나는 내내 그런 말을 자주 해주셔서 감사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편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고 감사했다.



저녁에는 MJ언니와 HJ 오빠도 함께 ‘문화관’에서 식사했다. 탕수육에 소스가 부워진 채로 나왔는데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정말 맛있었다.

아르바이트 할 때의 HJ 매니저님과는 스몰토크는 거의 나누지 않았는데, 밖에서 이렇게 다시 만나니 호칭도 바뀌고, 약간의 어색함 속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게 신기했다.

그러면서 펭귄 씨 생각이 났다. 사귀면서, 내가 알고 있던 펭귄 씨에서 남자친구로 관계가 변한 것이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오히려 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게 어색했다.

내가 아는 펭귄 씨는 아이 같고, 해맑고 단순하다. 하지만 남들이 보는 펭귄 씨는 어른 같고, 잘 웃으며, 능수능란하고 차분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모습들을 내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나에게는 놀라움으로 남는다.




호텔로 돌아와 간단히 할 일을 하고나서 반신욕을 했다.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 몰랐는데, 욕조에 앉아 있으니 둥실 떠오르듯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우울했다.



(하루를 보내며 중간중간 울렁이긴 했다. 기분인지 느낌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명치 깊은 곳에서부터 꿀렁이며 숨 쉬기가 힘들었다.)


호텔 안에 트윈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든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내가 누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워둘 텐데, 그 비어 있는 침대가 꼭 내 마음 같았다. 그 누구도 눕히지 않는 침대. 누군가를 객실 안으로 들이는 건 허락할 수 있다. 소파에 앉히고, 차를 대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침대만은, 절대 누군가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혼자인 내가 보였다.

혼자인 나.

그러나 이 말은 틀렸다.

많은 이들이 쓸고 간 후 혼자가 된 나였다.

그리고, 기꺼이 혼자인 나.



최근 들어, 정말 다시금 처음으로 이 침대에 앉힌 사람이 펭귄 씨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의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래전의 나, 죽음을 그리며 살아가던 그 시절의 내가 문득 스쳐 지나갔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상처받기가 그렇게 싫어?”



지난 나를 돌이켜 보았다. 막상 상처를 받아도 나는 덤덤했었다. “음, 역시 그렇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기대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더는 기대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부산을 떠나기 싫어져 수요일 열차를 취소했다.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센텀시티를 다시 돌아보고, 선물도 사고, 수요일에는 꼭 흰여울 문화마을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태풍 경보가 뜨던 여름 8월 20일.

그때도 부산에 왔었다. 그 시절의 나는 삶이 너무 버거워 이곳에서 모든 걸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호텔 침대에 멍하니 누워 죽음을 계략했던 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를 안쓰러워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도 불쌍하지 않았다.

다만 나도 모르는 이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네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외면하고 싶었다. 그저 가만히, 여기 머물러 있고만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되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자신이 이렇게나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실감하며 너무 괴로웠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가 힘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MJ 언니의 생일편지를 썼다. 언니가 호텔 밑 커피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서둘러 준비하고 내려갔다. 남포동에 있는 ‘스톤 스트리트’에서 식사하기로 하고 차를 타고 이동했다. 광안대교를 지나가는데, 날이 맑았다.

하늘과 바다의 수평선이 경계 없이 이어졌고, 그 광경이 참 좋았다.


식당 근처에 용두산 공원이 있었는데, 언니가 연인들이 데이트 하러 자주 오는 곳이라고 말했다. 다음에 남자친구랑 와보라며 덧붙였다. 그 말을 듣는 내내 펭귄 씨 생각이 났다. 마침 그의 전화가 왔다. 잠시 틈을 내 걸어온 전화였다. 짧았지만 마음이 맑게 떠올랐다.


식사를 마치자 언니에게 본사에서 갑작스러운 방문 연락이 왔다. 급히 기장 프리미엄 아울렛으로 향했다. 언니는 매장으로 향하고, 나는 홀로 아울렛을 둘러보았다. 언니 생일 선물도 신중히 골랐다. 그러다 펭귄 씨가 좋아하는 브랜드인 타미힐피거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커플티를 맞춰 입고 싶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몇 벌의 옷을 골라 몸에도 대보았지만, 그의 사이즈도 확신이 없었고, 함께 고르고 싶었기에 결국 내려놓았다.

언니의 일이 끝난 뒤, 온천천 근처의 ‘수안커피’로 향했다. 건물 외관이 성수동에서나 볼 법한 세련된 느낌이었다. 수안모카를 마셨는데, 금세 속이 불편해졌다.

아쉬움을 남긴 채 언니와 일찍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와 하루를 기록하며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펭귄 씨 생각만 났었다. 그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도대체 왜일까. 왜 상하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에게 집중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디를 가도 여기 펭귄 씨와 오고 싶다, 같이 입고 싶다, 같이 먹으러 오고 싶다—

모든 생각에서 그가 빠지지 않았다. 부산을 떠나기 싫은 이유를 명확히 알았다. 보고 싶어서, 가지 않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 펭귄 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가 내게 확신을 주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호텔을 나와 수영강변을 걸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펭귄 씨가 종종 내게 부산여행은 어땠는지 물었다. 여행하면서도 내내 그가 생각났던 것과 우울했던 것이 떠올랐다.

조금은 불안하고 침울했던 마음이 점점 커졌다. 터졌다고 해야 할까. 부산에 와서도 가라앉는 듯했던 마음이, 이제는 부풀고 얽힌 채 가득 찬 느낌이었다. 나는 부산에 와서는 펭귄 씨를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는 것이 서러웠다. 그가 내일 돌아오는 게 맞는지 물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모르겠다고 했다. 수요일 열차를 취소했고, 부산에 더 있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걱정했다.

여행 중 느낀 것과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중간에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강가에 앉아 기도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호텔 건물로 돌아왔다. 그제야 펭귄 씨 역시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곁에서 힘이 되어 줘야지.‘ 처음 가졌던 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도 밖에 있는지 걱정했다. 호텔 안이라고 하자 안도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자 마음이 어느덧 풀어졌다.


펭귄 씨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돼?”

순간 내게 실망한 게 있던 것인지 긴장됐다.

“앞으로는 혼자 생각하지 말고, 다 털어놔주면 안 돼?

네가 사라지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까, 나도 불안해.”

안도가 되는 동시에 고마웠다.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생각이 조금씩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내일 꼭 부산에서 돌아오라며, 역까지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니 집까지 데려다주겠고 덧붙였다. 기꺼이 승낙했다. 내내 생각났던 그를 보고 싶었으니까.


수요일 열차 표를 다시 결제했다.


흉터딱지라는 갑옷 2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