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잎 — 기꺼이, 재개발
2025년 1월,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적은 일기에는 이러한 제목이 달려 있다.
<삶에 균열을 내자. 그동안 내게 고착되었던 것 다 떼어내고 부수기.>
보이지 않는 앞날은 막연하다고 느껴질 수 있었지만, 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사랑에 얼마든지 대항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결단했다.
사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온전히 '나'의 문제도, 상대의 문제도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바뀌어야 했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서운함을 느끼는 나 자신 또한 미워하고 스스로 따지기보다는 이해해야 했다.
사랑에 분리는 없을 뿐더러, 어두운 감정으로 혼잡한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 초반, 보통의 연인들이 연락문제에 부딪히는 것처럼,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우정에서도 마찬가지로 관계에 있어서는 늘 상대를 우선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존감과 상관없이 그게 편했다. 오히려 나를 먼저 앞세우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펭귄 씨와 연애를 하면서, 최대한 나의 존재가 연인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일하는 시간대에는 연락 텀을 길게 두고 답장했다.
상대가 일이 다 끝난 후에야 편히 대화를 나누기를 기다렸다.
당연히 퇴근하면 연락이 잘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과 달랐다.
펭귄 씨는 말없이 먼저 자버리거나, 연락이 와도 짧게는 30분, 길게는 한두 시간씩 걸렸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서운함이 생겼다.
어느 때처럼 펭귄 씨가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고,
연락을 주고받던 중 한 시간 반 조금 넘게 답장이 없었다.
그러다 연락이 왔고 전화를 하게 되었다.
펭귄 씨는 지금 이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당연하게 '나와 전화하는 이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해주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이런 말도 할 줄 아네, 나름 뿌듯했다. 이유가 듣고 싶어져 물었다.
"왜 행복한데?"
그러자 펭귄 씨는 방금 전 묵상한 내용을 나누며
이렇게 말씀을 읽고 그때 역사하신 하나님이 오늘날의 자신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게 감격이라며,
말씀 묵상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민망함과 동시에,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펭귄 씨의 말에서 '나'는 없었다.
나와 통화하는 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서운했다. 어쩌면 그가 느끼는 사랑의 중심에 내가 없다는 사실에 비참해진 것 같았다.
그간 서운함을 애써 무시하고 떨쳐내려 했었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더불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하나님을 질투하는 걸까, 아니면 펭귄 씨와 나를 비교하며, 그를 질투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