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아 만든 자리

구멍난 잎 — 나 더하기 펭귄 씨는 하나

by 주나함

그맘때쯤, 우리는 ‘이해’와 ‘존중’이라는 단어 아래서 자주 부딪히곤 했다.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서는 다른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나—운동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나—가 아니라, 그가 아직 모르는 다른 모습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펭귄 씨가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바랐던 것은 결국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나는 그저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내 마음이 옳지 않다고 느낄 때조차, ‘이건 잘못됐어’라고 채점하기보다 “아, 이래서 이렇게 느꼈겠구나. ’나함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라고 말해주는 이해. 혹은 내 어떤 점을 조용히 인정해주는 말. 과한 칭찬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이너마이트처럼, 관계의 균열은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펭귄 씨가 준 책을 읽고 큰 깨달음을 얻은 나는 그 기쁨을 전하고 싶어 연락을 보냈다. 그날 저녁, 퇴근한 펭귄 씨와 차를 타고 돌아오며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동시에 그를 치켜세워 주고 싶었다.


“오빠, 그런데 그 책 진짜 좋더라. 오빠가 추천해주는 건 다 믿고 본다”


나는 그가 뿌듯해하며 겸손하게 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질문이 돌아왔다.


“노란색이야, 흰색이야?”


나는 흰색이라고 답했다. 그는 잠시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큰 책이야, 작은 책이야?”


보통 책보다 크기가 작아보였기에 ‘작은 책’ 같았다고 말하자, 보여달라고 했다. 책을 건네자, 그는 말했다.


“아, 이건 큰 책이야. 내가 읽었던 건 작은 건데, 훨씬 더 어렵고 좋았어”


순간, 내가 읽은 책이 별로라는 말일까. 수준이 더 낮다는 뜻일까.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날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떤 아기가 나를 한참 쳐다보자 사장님이 “저기 예쁜 언니 책 읽지?”라고 말해주셨던 이야기였다.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펭귄 씨의 반응은 인정이 아니라 정정에 가까웠다.

“그분 카페 사장님 아니야.”

“아니야, 카페 사장님이셨어.”

“사장님은 나이가 많아.”


그래, 할머니 뻘이셨다. 사장님이 맞다고 말하자 그는 덧붙였다.

“그러면 ‘예쁜 언니’라고 하신 건 잘못 말씀하셨네.”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렇게 감정이 가라앉는 듯 했다.




다음 날, 펭귄 씨가 지하철에서 인물 좋고 배려심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자랑하자 어제 일이 떠올랐다. 내가 무언가 말하면 그는 곧장 정정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기쁘게 꺼냈다. 그 모습이 어딘가 공평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가 표현에 서툴고 칭찬이 인색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칭찬하는 건 어렵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준 말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지난 저녁이었다.

나는 띄엄띄엄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가 오랫동안 응답하지 않자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는 곧 끊어졌고 그것이 두 번이나 반복됐다. 차분히 이야기하려던 마음이 금세 식어버렸다.

잠시 후 다시 연결된 전화. 며칠 전 서운했던 일을 꺼내며 솔직하게 말하려 했다. 그런데 펭귄 씨는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신경질적인 기운을 내비쳤다. 화가 난 사람은 나였는데, 왜 그도 화가 나 있는 걸까. 그 사실이 화를 더욱 돋구게 했다.


나는 내가 느낀 감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내가 화나 보이지 않아? 보통 사람들은 여기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거든.”

하지만 그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음에 이야기하자고만 했다. 언제나 그랬듯, 부딪힐 것 같으면 상황을 기약 없는 ‘나중에’로 미루었다.

전화 도중에도 답답함은 이어졌다. 내 말을 듣고 있다는 신호로 “응”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 내가 반복해서 물어야 겨우 “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무시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느끼는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결국 그는 계속해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얘기해서 풀고 싶었어. 그런데 오빠가 그렇게 말한 거니까, 오빠가 하고 싶을 때 먼저 연락해. 나는 먼저 연락할 일 없을 거야.”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은 무거웠다. 이해받지 못한 억울함과 답답함이 뒤엉켜 있었다. 그동안 쌓여 있던 작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이 고집 센 사람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 그간 그가 회피해왔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올랐고, 마음은 한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나를, 펭귄 씨를, 우리를 한없이 돌아보았다.

내가 너무 희생적이었던 걸까. 이렇게나 맞지 않는데 왜 잘 맞는다고 착각했을까.


좋으니까, 펭귄 씨를 좋아했기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었다. 다툼이 있더라도, 그가 피하려 하면 나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내 감정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조차 이상하게 느껴졌다.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 혹 욕심은 아닐까 되돌아보았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해주면 상대는 표현이 서툴더라도 배워서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서글펐다.

그리고 그것을 먼저 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씁쓸했다.


이틀이 넘도록 펭귄 씨에게 연락이 없었다. 월요일, 우리의 유일한 데이트 날도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가슴이 돌덩이로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전화로 다투었던 것을 떠올리며 후회도 했다. ‘그래, 내 잘못이지.’ 그리고 깨달았다. 펭귄 씨는 강압적인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상황에서는 말을 쉽게 꺼내기 못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사과받고 싶었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한데.’

억울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와 직접 대화하지 못한 채, 그를 이해하려 애쓸수록 답답함만 커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보다 이해가 필요했다.

첫 감정의 격렬함이 조금 가신 뒤, 나는 마음을 다시 잡았다. 분노가 죄가 되게 하지 말자. 화도 지혜롭게 내자. 어쨌든, 펭귄 씨는 아이 같은 면이 있다.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피하는 성향이 있지만, 이는 그저 그의 방식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에게 화를 내기보다, 상황을 설명하고, 달래고, 필요한 제안을 단호히 전달하는 것.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연락이 끊긴 지 사흘째 되던 아침, 톡이 와 있었다.

‘일어났어?’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그동안 얼마나 공중에 떠 있었는지 알았다. 그제서야 안도하며 한층 푹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곧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지금 봤어’라고 답했다.

저녁에 전화가 가능하냐는 그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밤 9시에 통화하기로 했는데, 그는 8시 50분쯤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정확히 9시에 전화할 줄 알았기에 조금 의외였다.


그는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다.


펭귄 씨도 그동안의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토요일에 내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던 일, 예배가 끝난 뒤 함께 저녁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던 일. 그리고 연락이 닿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전화로 공격적으로 말한 것이 속상했다고 했다.

얘기를 들으며 그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도 되었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러나 나 역시 서운하고 괴로웠다. 그런데도 나는 오히려 그를 달래주고 조언해주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게 대체 뭘까 싶었다.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

“나도 그동안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

그 말을 듣자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앞으로 하루 이상은 싸움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눈물이 났다.

‘아이를 키우는구나 내가….’

지난 이틀 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 했다. 슬픔과 고통에 흠뻑 젖어 있었구나. 나는 뒤늦게 나를 달랬다. 나를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상대를 원망할 것도, 나를 원망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아야 하는 문제였다.

다음 날 새벽, 새벽예배를 마치고 숙소로 가던 펭귄 씨가 전화를 걸었다. 잠을 잘 못 잤다는 내 답장에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몸도 아프고… 가슴도 너무 아파. 결혼하면 사모라는 자리 때문에 외부적인 부분에서 힘들 줄 알았는데, 외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할 줄은 몰랐어.”


연락이 없는 동안 나는 우리가 끝나는 줄 알았다. 펭귄 씨는 여러 번 사과하며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나와 연락하지 않는 동안 한 가지 하게 된 생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너보다 일찍 죽고 싶어. 네가 없는 건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으며 그의 사랑이 느껴졌다.


전화 통화를 하던 중, 해가 떠오르며 거실 베란다에 새벽 햇살이 완전히 드리웠다. 창가에 놓인 몬스테라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 광경이 문득 나와 펭귄 씨를 투영시켜 보게 했다.


마음이 이렇게나 갈라지고 아파도, 여전히 사랑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 몬스테라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이 갈라진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각각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잎, 한 몸인 것처럼. 잎이 갈라져 여러 개로 보일지언정, 잎은 결국 하나였다.


잎에 난 구멍은 결함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이해와 존중은 서로를 떼어놓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깎아 없애는 일이 아니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일이다.

p.s 몬스테라의 꽃말을 검색창에 쳐보았다. 꽃말은 깊은 관계, 그리고 웅장한 계획이라고 한다. 잎이 갈라진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