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도 작가의 수려한 필력에 감탄하면서 읽었던 책
나도 소소한 일상을 아름다운 언어들로 감쌀 수 있었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입동
어렵게 얻은 아이를 사고로 떠나보낸 한 부부의 이야기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라는 작가의 말이 가장 사무지게 와닿는 단편이 아닐까 싶다.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천명의 기립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 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 마냥
내가 붙들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꼇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처럼 보였다."
-입동 中-
2. 노찬성과 에반
할머니와 단둘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찬성이가
우연히 휴게소에서 강아지 에반을 만나고,
'책임'을 가지고 거두게 되며
함께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인간의 합리화를 잔인할만큼 있는 그대로보여주면서도,
찬성이가 어릴 땐 어렵게만 느꼈던
'용서'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성장기이기도 하다.
"찬성은 때로 에반이 자기에게 물어다주는 게
공이 아닌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공인 동시에 공이 아닌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걸 알았다."
-노찬성과 에반 中-
3. 건너편
8년동안 연애한 이수와 도화가
이별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
도화는 현실로 인해 이별을 택하면서도
한편으론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갔던
이수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너무 현실적이라 내가 다 눈물이 났다. 내가 헤어진줄..ㅠ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더 이상 고요할 리도, 거룩할 리도 없는,
유구한 축제 뒷날 영원한 평일,
12월 26일이었다."
-건너편 中-
4. 침묵의 미래
소실 직전의 언어들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수언어 박물관'과 그 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이 곳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를 이해해주는 사람 없이,
고독함 속에서 쓸쓸히 소멸되어간다.
그리고 작가는 이곳의 이야기를
언어이자 영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언어'라는 개념에 미시감까지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어렵고 난해했지만,
작가의 필력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검은 피부에 우아한 속눈썹을 가진 노인은
누군가 자기 말에 귀기울이고 눈맞춰준 뒤
'너무 평범하고 친근해 눈물이 날 것 같은' 모국어로
뭐라 대꾸해주길 바랐다.
'응'이나 '그래' 같은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그뿐이라도"
-침묵의 미래 中-
5. 풍경의 쓸모
자신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일상을 보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사진과 비유하여 풀어낸 이야기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르는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
중심이 아닌 풍경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하지만 한때는 무심하게 스쳐갔던 풍경도,
시간이 흐른 뒤엔 중심이 되어 프레임에 담길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6. 가리는 손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재이'가 노인 폭행 사망 사건에 목격자로 연루된다.
과연 아이는 정말 무고할까?
이야기는 재이 엄마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엄마는 다문화 가정이자 이혼 가정에서도
잘 자라준 재이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당연스레 재이는 폭행 사망사건을 단순히 목격했을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재이는 남들의 시선과 차별을 감내하면서 자라왔기에
그럴리는 없다고 믿으며.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리는 손 中-
7.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제자를 구하다가 사망한 교사 남편,
홀로 그 아픔을 견뎌내고 있는 아내는 어느날
사촌언니의 권유에 따라 사촌언니 내외가 머물고 있는 에든버러로 휴가를 떠난다.
그녀는 생전에 남편이 시리에게 종종 질문을 던지던 습관을 떠올리며
AI인 시리에게 몇몇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공허하면서도 어딘가 편안함을 주는 답변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녀의 상실의 깊이는 누구와도 쉽게 나눌 수 없는 것이며,
AI 역시 그녀에게 목적지를 가르쳐주되
함께 가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소리, 내가 쓰는 물소리,
내가 닫는 문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몰론 그중 가장 큰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 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