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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도가와 J Jul 18. 2020

조선인BC급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일본의 양심학자 우츠미 아이코(内海 愛子)교수.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통감하고 많은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처벌받은 사실을 고발한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1982년)>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 책은 25년이 지나서야 한국어로 번역되어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2007)>으로 소개되었다.


BC급전범은 일본이 패전 후, 연합국에 의해 선포된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 국제군사재판 조례의 전쟁범죄 유형으로 B항은 보통의 전쟁범죄,  C항은 반인륜 범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 죄목을 추궁받은 개인을 말한다.


일본의 BC급전범은 연합군의 최군사령부에 의해, 요코하마와 마닐라 등 세계 49곳의 군사 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 5,700여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943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 중에는 조선인도 14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25명은 유죄판결을 받고, 23명은 사형을 선고 받고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포로수용소의 감시원들이였다.  


일본군은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을 점령했고 그 당시 연합국의 포로가 30만명정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프로감시원이 필요했고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 3천여명이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강제징용됐다고 한다.  


동진회 이학래회장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지원이지만, 각군과 면에서 할당이 있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갔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매일 일본군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으며 엄격한 훈련을 받고,  병에 걸리면 의사도 약도 없어서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인 감시원조차 말로 설명할수 없을정도 차별받았다. 8월15일 일본이 항복선언하고 내가  전범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포로를 학대한 대가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난 2018년 M본부의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 취재로 동진회 회장을 맡고 계신 이학래 선생을 만났다. 처음으로 알게된 조선인 BC급전범에 대한 내용은  충격적이였고 피가 거꾸로 쏟았다.


2006년 K본부에서 815특집으로 <해방되지 못한 영혼, 조선인 BC급 전법> 방송된 바 있다. 그 이후,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 한국 국민들에게 조선인 BC전범에 대한 내용이 조금씩 알려지긴 했지만,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츠미교수의 책은 10년이상 감옥살이를 하고 살아남은 조선인 BC급 전범들의 생생한 증언과 일본의 재판기록과 비밀분서들을 파헤쳐서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이중 피해자임을 널리 알렸다. 잘 알다시피,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로 열린 전범재판은 누가봐도 공정성을 갖추지 못했다. 천황은 면책되었고, 전쟁을 주도한 일본전범자들은 풀려났다. 강대국 그들만의 짝짝궁이였다. 독립영웅 안중근 재판때도 그랬듯이 이 재판에서도 조선인을 담당하는 판사나 검사는 한명도 없었다. 서구열강들은 그들이 무력으로 쟁취한 식민지에 대해 역추궁 당할까봐 일본의 조선식민지배에 대한 죄를 묻지 않았다. 유럽은 약소국을 개무시했고, 미국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조선인BC급전범자들은  10여년 이상 수감생활 후, 1957년이 되어서야 모두 풀려났다고 한다.  그들은 조국으로부터 전범 또는 일제 앞잡이라고 비난 받았고 이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당시 한국정부는 그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반대로 멸시하거나 차별했다.  2006년이 되어서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그들이 BC급 전범이 아닌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받았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아직까지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학래회장은 1955년 4월 동진회를 결성하고 명예회복과 일본정부에 사죄와 보상입법을 요구하는 활동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 현재 그의 나이는 95세이다. 2018년 취재때, 그는 "살아있는 조선인 전범피해자가 단 3명"이라고 하셨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멍했다. 비록 2006년 방송되었지만, 다시 한번 재조명하고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한국정부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일본정부의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내야한다.  우츠미교수도 어느덧 80세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양심단체가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정부입장에선 그들이 가시 같은 존재다.  하지만 물러서면 안된다.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이 성취될때까지 당당히 맞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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