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계에는 히스테리시스(Hysteresis) 현상이 존재한다. 히스테리시스 현상은 어떤 물리량(物理量)이 현재의 물리 조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이전에 물질이 경과해 온 상태의 변화 과정에 의존하는 현상이다. 즉 물질이 거쳐 온 과거가 현재 상태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히스테리시스 현상은 전류와 자기장, 힘과 재료의 변위, 전류로 컨트롤되는 유체 공압 밸브의 응답 등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의 여러 시스템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경제학과 사회과학의 여러 변수 간의 관계에서도 히스테리시스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히스테리시스 현상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스프링에 작용하는 힘과 변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떤 스프링의 끝 단을 고정하고 다른 쪽에 힘을 주어 잡아 늘리는 경우, 스프링에 작용하는 힘과 늘어난 변위는 선형적인 관계가 있다. 힘을 F1~F3까지 힘을 증가시기는 과정과 F3~F1까지 힘을 감소시키는 과정 모두에서 힘이 F2 일 때는 변위가 x2이다. 힘이 가해지는 과정과 상관없이 힘 F2가 주어지면 x2의 변위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선형계로서 히스테리시스 현상이 없는 경우이다. 물론 스프링을 압축시킬 때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같은 실험을 고무 블록으로 해보자. 고무를 바닥에 놓고 위에서 힘을 조금씩 증가시키며 눌렀다가 다시 힘을 풀어 주면서 힘과 변위(눌림량)의 관계를 살펴 보는 실험이다. 우리는 이 실험에서 같은 힘이 가해지더라도 압축되는 과정에서의 변위와 회복되는 과정에서의 변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그래프에서 8000N의 힘이 가해졌을 때 압축 경로에서는 눌림량이 30mm이지만 회복 경로에서는 35mm인 것을 알 수 있다. 압축되었던 변형이 회복될 때는 느리게 회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수가 변해온 과정에 따라 특성치가 달라지는 것이 히스테리시스 현상이며 측정 그래프에서 경로가 그리는 폐곡선의 면적은 한 싸이클 당 소산되는 에너지 총량이 된다.
이러한 히스테리시스 현상은 고무로 만들어진 자동차 타이어에서도 일어난다. 정지되어 있는 타이어에 수직 방향으로 하중을 반복적으로 가하면 주로 사이드월의 고무에서 히스테리시스에 의한 에너지 손실이 일어난다. 회전하는 타이어에서는 더 재미있는 모습으로 히스테리시스가 일어난다. 타이어가 회전함에 따라 변형되는 부분이 연속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타이어가 회전하면서 노면과의 접촉면(타이어 프린트)에 들어갈 때는 압축이 되고 접촉면을 빠져 나올 때는 변형이 회복된다. 회전하는 타이어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그런데 노면 접촉면에 들어가 압축된 타이어 부분이 노면 접촉면을 빠져 나갈 때는 히스테리시스에 의해 회복이 늦게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타이어와 노면의 접촉면은 타이어의 기하학적 중심 위치에서 살짝 앞으로 치우치게 되고 타이어 접촉면에서의 반력이 타이어 회전을 방해하는 성분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타이어의 구름 저항의 본질인 것이다.
히스테리시스라는 용어는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된 현상이 그 원인을 제거한 후에도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기 침체가 원인이 되어 실업률이 높아졌는데, 경기가 좋아진 이후에도 실업률이 상당 기간 회복이 안되는 것이 한 예이다. 로버트 치알디니는 사회적 행동은 사람과 상황 사이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이라고 했다. 상황이나 상호작용에 다수의 대중이 반응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떤 변수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사회 심리적 현상과 행동에는 시간 지연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히스테리시스는 거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히스테리시스의 그리스 어원은 'coming behind'이다. 히스테리시스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히스테리시스를 한글로는 밟을 리(履), 지낼 력(歷) 자를 써서 이력현상이라고 한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 준다고 하니 이 또한 히스테리시스를 잘 정의해주는 말이다. 취업을 해야 할 때 반드시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이다. 과거에 어디서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경력으로 역량을 키워 왔는지가 이력서에는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이 살아 가는 인생에 있어서도 히스테리시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나 보다.
필자는 이력서를 많이 써보지는 않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회사에 취직할 때 한 번 써보았다. 그것도 거의 내정되어 있는 곳을 위해 형식적으로 쓴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이력서 쓸 일이 없었다가 현대차를 퇴임하고 이력서를 다시 써 보았다. 물론 경력이라야 학력 밖에 없었던 때에 비하면 쓸 수 있는 경력이 많이 늘었다. 한 줄이라도 더 쓰려고 했던 고민들을 안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청년 시절 이력서를 쓸 때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내가 밟아온 길을 되돌아 보는 느낌이 매우 컸다. 처음 회사에 갔을 때 가졌던 첫 인상, 새로운 직책을 맡았을 때 의욕과 성과, 어려웠던 문제를 풀었을 때 성취감, 지금 생각해도 좀 미숙했고 아쉬웠던 모습들, 사람들과 함께 했던, 재미있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흐뭇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한, 자기 연민적 감정이 찾아 왔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나 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성장해온 내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내 스스로 격려도 해주었다. 그러면서 함께 해주고 나를 지지해주고 성장시켜준 고마운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 갔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계신 지 모르는 분들도 꽤 있지만 허공으로 전달되는 나의 깊은 고마움을 알고 계실지... .
한편으로는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내렸던 결정에 대한 결과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박사 학위 받은 후 내렸던 직장 선택의 결정, 직무 선택, 부서 이동에 대한 선택, 해외 근무에 대한 결정 등 나의 이력에는 크고 작은 결정이 있었다. 내가 밟아온 과거와 내렸던 결정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 볼 수도 있었다. 그럼 현재의 나는 어떤가? 내가 내렸던 결정에 대한 후회가 없고 그런대로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으니 결정에 큰 과오는 없었던 것 같다. 심리학에서 심리 탄성(resillience)이라는 용어가 있다. 역경과 시련, 실패를 경험했을 때, 충격에서 회복하여 더 큰 성장을 이루어 내는 능력을 말한다. 후회되거나 큰 충격을 받은 실패의 경험도 있었던 것 같으나,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자기합리화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 때마다 심리 탄성이 잘 작용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내가 밟고 살아 가는 길이 어떻게 미래의 나에게 영향을 미칠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무언가를 경험하기 전과 후는 바뀌어 있다고 한다. 앞으로 업무나 직무에 관련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험보다는 사람과 상황 사이의 연속적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과 타인의 삶이 더 윤택해지는 경험과 성장의 과정을 밟고 싶다. 내가 밟아 온 길이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듯이, 지금 밟고 있는 길이 미래의 내 모습을 만들어 줄 것 이다. 소중한 과거의 의미를 잘 간직하며 사람과 믿음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하며 느끼고 경험한 바를 실천해 나가는 삶의 과정을 살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밟아갈 여정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생이 끝나는 날, 사람들과 세상의 기억 속에서 나를 새롭게 정의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