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pace and Time

존재의 존엄을 짓는 건축

라카통 & 바살의 '덧붙임'의 철학

by Jwook

며칠 전, 재건축이 진행 중인 아파트 단지를 지나쳤다. 중장비가 건물을 무너뜨리는 소리, 먼지 속에서 드러나는 벽면의 단면. 멀리서 보이는 그 풍경이 묘하게 낯설었다. 저기 어딘가, 몇십 년을 살아온 누군가의 거실이 있었을 것이고, 부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아침을 먹고,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들의 목소리가 오가던 시간들.


지금 그곳에 살던 어르신들은 어디 계실까. 아마 어딘가 임시로 머무는 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적응하고 계실 것이다.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 돌아올 수 있다고 하지만, 돌아올 그곳은 같은 주소일 뿐 같은 집은 아니다. 30년, 40년 쌓인 시간의 무게는 어디로 가는 걸까.


'건축'이란 무언가를 짓는 일이긴 하지만, 늘 마음속에 품은 질문이 있다. "무언가를 짓는다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없애는 일일까?" 새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해, 누군가의 30년 삶이 하루아침에 지워진다. 그 시간의 무게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 질문이 나를 두 사람에게 데려갔다. 안 라카통(Anne Lacaton)과 장 필립 바살(Jean-Philippe Vassal). 그들은 부수지 않고, 다시 살린다. 새로 짓지 않고, 덧붙인다. 그들의 건축은 혁신이 아니라, 존중의 언어이자 파괴의 시대에 던지는 가장 강력한 윤리적 선언이다.

안 라카통(Anne Lacaton, 1955~)과 장 필립 바살(Jean-Philippe Vassal, 1954~)은 1987년 파리에서 함께 사무소를 설립한 프랑스 건축가 듀오다.
2021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며 "부수지 않고, 덧붙이고, 재사용하는" 건축 철학이 인정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민주적이고 생태적이며 경제적인 건축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파괴의 시대에 '존재'를 택한 건축과 합리성


1980년대 이후 유럽 도시들이 반복한 선택은 단순했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의 재건축, 재개발과 같이 낡은 공공주택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 건축물을 올리는 것이다. 철거와 재건축. 라카통 & 바살(Lacaton & Vassal)은 이 자명해 보이던 절차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이 제시한 원칙은 간명하지만, 그 속에 담긴 입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부수지 않는다. 덜어내지도 않는다. 단지 추가하고, 전환하고, 재사용할 뿐이다."

이 고집스러운 철학이 구현된 현장이 보르도 그랑파르크 주택단지(Grand Parc, Bordeaux, 2017)다. 기존 건물의 뼈대는 유지한 채, 외벽에 투명한 구조체와 발코니를 더했다. 어찌 보면 심플해 보이는 이 시도의 결과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거주 공간은 넓어졌고, 자연광과 통풍은 이전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진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공사하는 전 기간 동안 주민들은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던 것일까?

기존 주거동(왼쪽)과 재생 이후의 모습(오른쪽). 철거 대신 외부에 투명한 발코니·겨울정원 구조를 덧붙여 주거 면적과 채광, 환기를 확장. ⓒ The Guardian
Grand Parc, Bordeaux (2017). © Philippe Ruault / The Guardian
라카통 & 바살의 방법론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철거 생략으로 철거·폐기물·이주·임시 거주 비용을 없앤다.
둘째, 공장 제작(prefabrication). 유리 구조체와 발코니를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 외벽에 덧댐. 현장 작업 최소화로 주민은 이주할 필요가 없다.
셋째, 외피만 개입. 내부는 건드리지 않고 외벽에 3~4미터 '겨울 정원' 추가한다.
그 결과로 비용 1/3(평당 2,000유로→600~800유로), 공기 절반(3~5년→1~2년)으로 줄인다.
핵심은 질문의 전환. "새 건물을 어떻게 지을까"가 아니라 "있는 것을 어떻게 더 좋게 만들까"

이 단순한 '덧붙임'은 도시 재개발의 논리에 맞서는 조용한 저항인 동시에, 가장 합리적인 경제적 실천이었다. 철거와 신축 대비 현저한 비용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이라는 기술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그들의 윤리적 선택은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닌, 가장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대안임을 증명했다. 그들에게 존중은 곧 효율이었다.


머무름의 윤리 —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환대


이들의 태도는 단순한 재생을 넘어선다. 이는 철학적으로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선언이다. 하이데거는 "거주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거주함(Wohnen)'은 단순히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펼쳐내는 근원적 양식이다.


라카통 & 바살에게 건축은 바로 이 '거주함'의 조건을 회복하는 일이다. 낡은 벽과 바닥은 결함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표면이며, 그 안에는 사람들의 냄새와 관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들은 공동체의 시간을 지우지 않고, 새로운 층을 입혀 그 역사를 계승한다.


이러한 철학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도 닿아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는 결코 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 말하며, 타자의 얼굴을 통해 윤리적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라카통 & 바살은 그 말을 건축으로 실천했다. 낡은 구조물, 오래된 주거, 약한 벽조차 '쓸모없는 타자'로 배제하지 않고 함께 사는 선택. 그들의 건축은 비폭력적 공간의 윤리이며, 존재에 대한 윤리적 환대를 공간에 새긴 것이다.

Tour Bois le Prêtre Rehabilitation (Paris, 2011). © Lacaton & Vassal / Architecture 50

덧붙임의 철학 — 벤야민의 '겹쳐진 시간'과 유연성


아라타 이소자키가 "폐허로부터 시작한다"고 했다면, 라카통 & 바살은 시간이 남긴 흔적 위에 층위를 더한다. 그들이 덧붙이는 것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기억의 물질화이자 시간의 투명한 막이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를 단선적 진보가 아닌 '지금-시간(Jetztzeit)'의 겹침으로 보았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 속에 잠재된 채 불현듯 섬광처럼 되살아난다. 라카통 & 바살의 유리 발코니와 겨울정원은 바로 이 시간의 겹침을 공간화한 것이다.


낡은 벽 위에 덧대어진 투명한 층은 과거를 지우지 않고, 현재 속으로 통과시키며, 두 시간을 동시에 살게 한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덧붙임(addition)—새로움이 아니라, 기억의 확장이다.


특히 그들의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증축 사례는 이 '덧붙임'의 유연성 철학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은 버려진 미술관 공간에 최소한의 개입만을 하고, 새로운 벽과 바닥 대신 '미완의 상태'를 유지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마감되지 않았고, 벽은 거칠게 남겨졌다.


이 '미완의 공간'은 사용자(예술가, 큐레이터)에게 기능과 프로그램의 자유도를 극대화했다. 한 전시가 끝나면 공간은 다시 비워지고, 다음 전시를 위해 무한히 변형될 수 있다.


덧붙임은 이제 공간을 확장하는 것을 넘어, 사용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건축의 고정된 규범을 해체하는 철학적 실천이 된 것이다. 버려진 현대미술관을 '미완의 공간'으로 재해석하여, 사용자에게 프로그램의 자유도를 극대화했다.

Palais de Tokyo Extension (Paris, 2012). © Philippe Ruault / Arquitectura Viva

존재의 존엄을 짓는 일 — 공동체의 지속


라카통 & 바살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건축이란, 진정 무엇을 위한 일인가?" 그들에게 건축은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다시 세계 속에 놓는 철학적 실천이다. 그들은 보여준다. 파괴하지 않고도 혁신이 가능하며, 덧붙임이 타협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라는 것을.


그들의 건축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살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건물이 담고 있던 시간, 기억, 그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일이다. 철거 현장의 텅 빈 공허함 대신, 그들은 거주민의 일상이 지속되는 풍요로운 삶의 현장을 창조한다.


나는 그들의 건축을 보며 아파트 재건축 철거 현장에서 느꼈던 공허의 감정을 떠올렸다. 건축은 언제나 '짓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일 수도 있다. 키 재는 선 하나, 낙서 한 줄이 담고 있던 무수한 일상의 순간들. 그것을 지우지 않고 품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의 존엄을 짓는 건축이다.


"우리는 부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흔적 위에, 기억과 공동체의 존엄을 담아 다시 인간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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