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凝視): 필터 너머, 나의 구조를 묻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어느 시대, 어느 세대의 책장에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집 책장의 두툼한 양장본으로, 혹은 아이들의 손때 묻은 만화책으로. 형태는 달라져도 그 안의 숨소리는 여전하다. 트로이의 목마와 판도라의 상자는 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서, 광고의 화려한 이미지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된다.
신화는 이미 끝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일 도착하는 오래된 질문이다. 왜 인간은 그토록 신화에 매달리는가. 아마도 신화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농축'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체의 한복판에는 언제나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자리한다.
불화의 여신이 던진 황금사과. 그 위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판결을 맡은 파리스의 앞엔 세 가지 길이 놓였다. 지배자의 권력, 전사의 지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파리스는 망설이지 않고 미(아프로디테)를 택했다. 권력(헤라)과 지혜(아테나)는 긴 시간의 인내와 삶의 증명이 필요한 '완성형'의 가치였으나, 미(美)는 찰나에 신성을 경험하게 하는 강력한 즉시성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파리스를 비웃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황금사과의 전장을 매일 손바닥 위에서 마주한다. '뼈말라'라는 기형적인 단어가 찬사가 되고, AI 필터가 빚어낸 '표준 얼굴'이 현실을 압도한다. 체력과 인격을 쌓는 것은 10년 단위의 고단한 프로젝트지만, 필터는 0.1초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 즉시성의 유혹 앞에서 너무도 쉽게 자신의 본모습을 '공사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하지만 신화는 안타깝게 말한다. 그토록 갈구했던 아름다움은, 그것을 담을 그릇이 무너지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찬란한 헬레네도, 트로이의 황금빛 성벽도,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아름다움이 잘못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지탱할 토대가 함께 서 있지 않았을 뿐.
트로이의 몰락을 지켜본 고대의 눈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통제되지 않은 미(美)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은 세계를 지탱할 세 가지 기둥을 세웠다. 진(眞)·선(善)·미(美). 이 사유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저서 『건축십서(De Architectura)』에서 건축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견고함(Firmitas), 유용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을 꼽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견고함은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다. 캔버스가 찢어지면 아무리 훌륭한 그림도 사라진다. 건물이 무너지면 아무리 섬세한 조각도 의미를 잃는다. 유용함은 아름다움이 지속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다. 시대가 외면한 건물은 결국 철거되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간은 폐허가 된다.
그래서 세 가지는 위계가 아니라 공생의 관계다. 견고함과 유용함은 아름다움의 토대가 되고, 아름다움은 견고함과 유용함에 의미를 부여한다.
건축에서 '견고함'은 중력과의 싸움이다. 건물은 매 순간 중력과 바람과 지진이라는 외력(外力)을 견뎌낸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보다 내부의 저항력, 즉 내력(耐力)이 더 커야 한다. 건축가는 이 보이지 않는 응력(應力)의 균형을 위해 철근을 박고 기둥을 세운다. 무너지지 않아야 비로소 건축으로 인정받는다.
그렇다면 삶의 견고함은 무엇인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박동훈을 떠올린다. 그는 배신과 모욕, 경제적 궁핍이라는 수많은 외력을 견뎌냈다.
삶의 견고함이란 결국 내 안의 내력을 키우는 일이다. 헬스장에서 쌓는 체력, 조금씩 마련하는 경제적 자립,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근육처럼.
'유용함'은 시대가 건물에게 묻는 질문이다. 중세의 대성당은 신과의 만남이라는 질문에 수직의 공간으로 답했다. 19세기 백화점은 욕망의 전시라는 질문에 화려한 아케이드로 응답했다. 오늘날의 복합문화공간은 단절된 개인들에게 연결의 경험을 건넨다.
시대는 변하고, 질문도 달라진다. 그러나 건축이 시대의 질문에 정확히 응답할 때 비로소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시대가,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에 응답할 때 비로소 쓸모를 갖는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이 두 가지와 함께할 때 비로소 온전히 빛나는 가치다.
중세 고딕 성당을 떠올려본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의 빛.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구조의 혁신 덕분에 가능했다. 플라잉 버트레스가 하중을 분산시켰기에 벽은 얇아질 수 있었고, 그 얇아진 벽에 빛이 쏟아졌다.
구조가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아름다움이 구조를 혁신하도록 강제했다. 빛은 곧 신이었고, 더 많은 빛을 담기 위한 미적 갈망이 없었다면 플라잉 버트레스는 발명되지 않았을 것이다. 견고함이 유용함을 가능하게 했고, 유용함이 형태를 결정했으며, 그 필연성이 아름다움으로 꽃피었다.
세 가지는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 진화했다. 구조와 기능과 미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뼈대가 부실한 건물에 아무리 아름다운 장식을 해도, 그 아름다움은 건물과 함께 무너진다.
역으로, 아무리 견고한 구조라도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저 창고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외력과 싸우고 있으며, 나의 내력은 충분한가.
지금 우리는 서로의 파사드만을 탐닉하고 있다. 화면 속에서는 결과만 보이고, 기초를 파고 뼈대를 세우는 인내의 시간은 삭제된다. 타인의 잘 닦인 겉벽을 보며 나의 공사 중인 내부 구조물을 초라하게 여기는 밤들이 깊어간다. 과정 없는 아름다움에 익숙해질수록, 우리의 내면은 파리스의 트로이처럼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가련한 상태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아름다움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식장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대전의 풍경을 기억한다. 안개는 도시의 모든 결함을 부드럽게 감쌌다. 흐릿하게 번지던 도시의 윤곽. 그럼에도 그 풍경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나는 칸트의 질문들을 떠올렸다. 무엇을 알 수 있고(진), 무엇을 행해야 하며(선),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미).
도시가 완벽해서가 아니었다. 무질서한 현상을 나의 단단한 내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구조가 그 자리에 제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는 힘과 올바르게 행동하는 힘이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필터 너머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가려낼 수 있다.
아름다움은 순수함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존재하려면 그릇이 필요하다. 단단한 구조라는 캔버스 위에, 시대와 대화하는 기능이라는 물감과 함께, 비로소 아름다움은 형태를 얻는다. 그렇게 지어진 삶은 필터 없이도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