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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etters of Us

점심시간과 멀티버스 사이에서

가장 실패한 우주에서 선택하는 법

by Jwook

국이 식어가는 동안


점심시간, 밥을 먹으며 동료와 대화를 나눈다. 자녀 문제, 남편 문제. 조금만 방심하면 쏟아질 것 같은 사생활이 반찬처럼 테이블 위에 놓인다.


"아… 내가 결혼을 안 했으면." "아이가 없었으면, 인생이 좀 달랐을까."


앞자리에 앉은 상사는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아내가 말하길, 본인이 걷는 모습이 시아버지와 너무 닮았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들으며 본인도 웃어야 할지, 씁쓸해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점심시간에 오간다. 국이 식어가는 동안, 누군가의 인생이 잠시 요약된다. 우리는 늘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서로의 삶을 스쳐 듣는다. 각자의 후회가, 각자의 아쉬움이 밥상 위에서 잠깐 형태를 갖췄다가 다시 흩어진다.


"결혼 안 했으면..."이라는 동료의 말이 공중에 떠 있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거나, 잠시 침묵하거나, 아니면 자기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것뿐이다.


선택이라는 점들


나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살며시 한마디를 한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인생의 분기점이 될 만한 선택지 앞에 서게 된다. 그 선택이 더 나은 삶으로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순간의 우리는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결국 하나를 고른다. 고를 수밖에 없다.


선택을 하고 인생은 흘러간다. 그리고 여러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는 그 결과 속에서 살아간다. 되돌리고 싶어도, 지금은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그때그때의 선택이라는 점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선이다. 때로는 곧게, 때로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선.


물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전혀 다른 삶이 펼쳐졌을 것이다. 분명히. 키르케고르가 인간을 '선택하는 존재'라고 하였을 때, 그는 바로 이 불안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고, 그에 따른 결과를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늘 다른 가능성 앞에서 흔들린다. 저 길로 갔었다면,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순간 용기를 냈더라면.


만약 그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다른 선택을 한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세탁소 주인과 우주의 갈라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우주가 갈라지고, 수많은 멀티버스가 펼쳐지지만 이 영화의 출발점은 놀랍도록 소박하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년 여성, 에블린. 지치고, 실수투성이이고, 늘 한 박자 늦은 사람.

에블린 가족의 삶이 그대로 쌓여 있는 세탁소. 영화는 이 가장 평범한 공간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만약 네 인생이 가장 바닥에 와 있다고 느껴진다면, 가장 못났고, 가장 실패한 상태라고 믿어진다면, 그래도 이 삶을 계속 살아갈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 속 멀티버스는 우리의 불안을 시각화한 장치다. 결혼하지 않은 나, 아이를 낳지 않은 나, 성공한 나, 실패하지 않은 나. 모든 '다른 나'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마치 점심시간 테이블에 앉아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고 중얼거리는 우리처럼.


에블린은 영화배우가 된 우주, 쿵푸 마스터가 된 우주, 요리사가 된 우주를 건너다닌다. 그곳에서 그녀는 화려하고, 능숙하고, 성공했다. 하지만 그 모든 우주를 거쳐 그녀가 돌아오는 곳은 결국 세탁소다. 세금 서류가 쌓여 있고, 남편은 여전히 엉성하고, 딸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는 그곳. 마치 점심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우리처럼.


가장 못난 우주에서의 선택


하지만 영화는 의외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수많은 가능성 중 어느 하나가 더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공한 우주가 실패한 우주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세계에서의 아주 사소한 선택을 붙든다.

딸의 손을 잡는 것. 남편의 어설픈 유머에 진심으로 웃어주는 것. 세무 공무원에게 이유 없이 친절해지는 것. 그냥, 조금 더 다정하고 부드러워지는 것.


이 영화는 거대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카뮈가 부조리 앞에서 그랬듯, 의미 없음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에블린이 발견하는 것은 "가장 실패한 우주"에서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공한 우주의 나도, 유명해진 우주의 나도 아닌, 바로 이 세탁소에서 세금 서류와 씨름하는 나. 자녀와 싸우고, 남편에게 짜증 내고, 밥을 짓고 빨래를 접는 나. 그 나로 살아가는 것. 그 선택이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일이 아닐까. 화려한 다른 가능성들을 다 알면서도, 이 평범한 삶을 선택하는 일.

형광등 아래 국세청 책상. 가장 화려하지 않은 우주,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자리.

다시, 점심시간


그래서 이 영화는 화려한 멀티버스 영화가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중년의 영화다. 점심시간에 오간 한숨과, "그때 그 선택이 맞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다.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말해준다.


지금 이 삶이 가장 밑바닥처럼 느껴질 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선택들이 여전히 인생을 이어가게 만든다고. 다른 우주의 화려한 나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 더 친절해지기로 선택하는 나.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면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점심시간은 끝나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멀티버스는 닫히고, 현실은 여전히 단 하나뿐이다. 테이블 위에는 식은 국그릇과 빈 접시만 남아 있다.

내일도 누군가는 점심시간에 묻겠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리고 우리는 또, 답 없는 질문 앞에서 각자의 국을 저을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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