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gmented Memory] 다중 중력의 건축

by Jwook

에셔의 그림 앞에 서면 늘 길을 잃었습니다. 오르는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는 계단들, 중력이 뒤섞인 공간, 그 불가능한 세계가 이상하리만큼 친숙했습니다. 이번 '매직 미러(Magic Mirror)'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쓴 두 편은 그 감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글은 평소 쓰던 방식과 조금 다릅니다. 서술보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고, 의미보다 감각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설명하지 않으려 했고, 하나의 해석을 권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 두 편을 관통하는 정조가 있다면, 이 프로젝트의 주제이기도 한 '달콤한 슬픔(Sweet Sorrow)'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만 떠올리며 읽어주셔도 충분합니다.


1. 유리


아침. 차가움.

로비의 유리가 나를 받아들인다. 아니, 반사한다. 나는 그 차이를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발걸음이 늦어진다. 습관처럼.

유리 속에 또 다른 나. 어느 쪽이 진짜인지 묻지 않는다. 둘 다 진짜여도 좋고, 둘 다 가짜여도 좋다.


균열.

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로 무언가 깨진다. 유리가 아니다. 시간도 아니다.

파편들이 쏟아진다. 어떤 조각은 날카롭게 손끝을 스치지만 피는 나지 않고, 어떤 조각은 이미 부서져 분진처럼 햇빛 속에서 반짝인다.


나는 그것들을 모으지 않는다.

갓 구워낸 벽돌의 온기. 수십 년 전 허물어진 담벼락의 흔적.

과거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늘 지금 여기, 내 곁에서 숨 쉰다.

그저 그 속을 걷는다. 천천히.

M.C. Escher, <Relativity>, 1953, Lithograph(석판화) 세 개의 중력이 공존하는 세계. 어떤 이에게는 바닥인 곳이 다른 이에게는 벽이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천장이 된다. 익명의 존재들은 각자의 중력 안에서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자신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2. 계단


에셔(M.C. Escher).

<상대성 Relativity> 앞에 섰던 날. 불가능한 계단들 사이를 헤맸다. 길을 잃었다. 두렵지 않았다.

오르는 자와 내려가는 자. 같은 계단, 다른 중력.


세 개의 중력이 공존한다.

누군가에게는 바닥. 누군가에게는 벽. 또 누군가에게는 천장.

그들은 마주치지만 충돌하지 않는다. 표정도 없이. 개성도 없이. 익명의 존재들.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


각자의 계단. 각자의 중력. 각자의 기억.

우리도 그렇게 산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듯 보이지만, 각자가 쌓아 올린 기억의 중력 아래서, 각자의 기울기로 세상을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에셔의 계단을 내려온다. 천천히.

로비의 유리가 다시 보인다. 같은 유리. 다른 유리.

나는 언제 이곳을 떠났는가. 언제 돌아왔는가.

알 수 없다.


3. 섬광


벤야민(Walter Benjamin).

기억은 '연속된 역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순간에 갑자기 현재를 습격하는 '이미지의 섬광'.

섬광.

예고 없이. 맥락 없이.

나에게 그 섬광은 공간의 언어로 온다.


도시는 낡은 것을 부수고 새것을 올린다. 하지만 몸은 새것의 매끄러움보다 오래된 동선의 거칠음을 먼저 기억한다.

머리는 지도를 잊어도, 발바닥은 골목의 기울기를 잊지 않는다.

계단의 높낮이. 복도의 습기. 문손잡이의 차가움.


신도시의 유리 빌딩 속에서도 우리가 문득 낯익음을 느끼는 이유. 몸 안에 축적된 파편들이 현재의 공간과 반응하며 섬광을 일으키기 때문.

과거와 현재가 포개진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공간적 감각.


벤야민의 별자리.

파편들이 모여 하나의 별자리를 이룬다. 연결되어 있지만 연속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빛나지만 도달할 수 없다.

나는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다만 유리창 앞에서 문득, 무언가 내 발밑을 스친다.


4. 파편


나는 이제 내 기억들을 하나의 매끄러운 이야기로 꿰맞추지 않기로 했다.

파편인 채로 두는 편이 솔직하다.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조각들. 그것들은 이미 내 삶의 뼈대를 이루며 나를 통과해 왔다.


에셔의 계단처럼, 나의 기억들도 때로는 서로를 배반하고 때로는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끈다. 어떤 기억은 나를 미래로 밀어 올리고, 어떤 기억은 발목을 잡아 과거의 웅덩이에 앉혀둔다.

하지만 이 상충하는 힘들은 충돌하지 않는다.

다중 중력. 각자의 질서. 입체적인 자아.


거울 앞에 선다. 유리에 비친 나는 어느 계단 위에 서 있는가.

어디로 오르는가. 혹은 내려가는가.

선명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분명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 내 발밑의 중력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사실.


로비의 유리창을 뒤로한다.

구두 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 규칙적으로. 불규칙적으로.

그 소리는 벤야민의 별자리처럼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며 내게 묻는다.

나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걷는다.

발은 안다. 몸은 기억한다.

기억의 파편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떠다닌다. 중력 없이. 방향 없이.

나는 그것들과 함께 걷는다.


계단.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