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하지 못하는 삶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by Jwook

선택할 수 없는 침묵에 대하여


이 시리즈를 쓰면서 나는 줄곧 침묵을 선택으로 이야기해왔다. 스토너는 전쟁에 가지 않기로 했다. 리유는 영웅이 되기를 거부했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저항을 멈추었다. 와타나베는 구하지 않기로 했고, 이시가미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침묵들은 제각각 달랐지만,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를 다시 읽으면서, 그 전제가 흔들렸다. 선택할 수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 여기서 말하는 ‘선택할 수 없는 상태’란, 단순히 선택을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와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할 기준 자체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물론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일반적 조건이라기보다, 하나의 극단에 가까운 사례다. 우리는 대부분 그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린다. 침묵이 의지가 아니라 무능의 결과일 때,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더 불편한 질문 — 우리는 지금 어느 쪽에 있는가.


웃고 있는 사람의 내부


요조는 선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을까.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웃는 사람이다. 분위기를 맞추고, 농담을 던지고,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관계 속에 스며든다.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사회적인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웃음이 이상하게 낯설다. 기쁨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방식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요조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감정이 왜 변하는지, 어떤 말이 왜 상처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해하려 하기보다 흉내 내기로 선택한다. 웃음을 배우고, 타인을 즐겁게 만드는 법을 익히고, 자신을 가볍고 해롭지 않은 존재로 연출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선택이었을까. 그 웃음은 들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들키지 않아야 했던 것 —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감각, 타인이 살아가는 방식이 끝내 이해되지 않는다는 공포 — 을 그는 평생 숨겼다. 숨겼다기보다, 꺼낼 언어 자체를 갖지 못했다. 선택이 작동하려면 먼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요조에게는 그 출발점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수행할 ‘자기 인식의 기반’ 자체가 무너진 상태에 가까웠다. 그의 익살은 의사표현이 아니라 보호 장치였고, 관계는 만남이 아니라 위장을 위한 무대에 가까웠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사람


『용의자 X의 헌신』의 이시가미는 말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처절했고 비극적이었지만, 분명히 선택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았고, 그 무게를 감당했다.


요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기준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이렇게 남는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을 설명할 언어를 끝내 갖지 못한 사람으로. 그는 ‘무능한 인물’이라기보다,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구조—욕망, 판단, 자기 이해—가 동시에 흔들린 존재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과 책임이 사라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이 긴장은 끝내 해소되지 않은 채 남는다. 요조의 책임은 윤리적 판단의 전면에 놓이기보다는, 반복적으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과정 그 자체에 남아 있다. 그는 악인이 아니지만, 무고한 존재도 아니다.


요조의 삶은 분명히 문제적이다. 그는 술에 의존하고, 관계를 망치고, 타인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를 비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비난을 끝까지 밀어붙이게 하지 않는다. 요조는 악의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타인을 해치려는 의도 없이, 끝까지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그러나 끝까지 다가가지 못한다.


문제는 그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


변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명할 수 없는 상태


이 글들이 말하는 침묵의 윤리는 의식적인 태도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행동하지 않기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무게를 아는 상태. 스토너가 그랬고, 리유가 그랬고, 이시가미가 그랬다.


요조는 그와 다른 자리에 있다. 그는 변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는 상태에 가까웠다. 변명이라는 것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조는 그 언어를 갖지 못했다.


그의 침묵은 윤리가 아니다.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다. 어떤 침묵은 용기에서 비롯되고, 어떤 침묵은 소진에서 비롯된다. 그 두 가지는 겉으로 같아 보여도, 안쪽이 전혀 다르다. 스토너가 ‘말하지 않음을 견디는 사람’이었다면, 요조는 ‘말할 수 없음 속에 머무는 사람’에 가깝다. 이 차이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다.


요조는 선택을 거부한 인물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구조에서 이탈한 인물이다.


왜 지금, 이 소설인가


『인간 실격』은 1948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소설은 다시 읽히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20대는 이전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자주 자신을 표현하며 살아간다. SNS는 쉬지 않고 반응을 요구한다. 어떤 사안에도 의견을 가져야 하고, 의견은 즉각 언어가 되어야 한다. 침묵은 무관심으로 읽히고, 중립은 비겁함으로 읽힌다. 표현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그러나 그 표현이 반드시 이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자주 자신을 연출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맞춰 자신을 조정한다. 요조가 익살을 배운 것처럼. 우리는 말을 더 많이 하지만, 그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덜 이해한다. 표현의 과잉이 오히려 자기 이해의 결핍을 가리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반응은 점점 더 빠르고 많아지지만, 그것은 자기 이해의 증거가 아니라 대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해 대신 반응으로, 질문 대신 노출로 자신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다만 이것이 곧바로 모두를 요조의 상태로 밀어 넣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연출과 이해 사이를 오가며, 부분적으로는 알고, 부분적으로는 모르는 상태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요조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는 SNS 시대 이전에 이미,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살아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낯설지 않다는 것 —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힌다는 것. 그것이 78년 전에 쓰인 이 소설이 지금도 서점 베스트셀러 칸에 꽂혀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


요조는 이 시리즈에서 가장 불편한 인물이다. 그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경계를 보여준다.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언제 윤리가 되고, 언제 붕괴가 되는지를.


그리고 그 경계는 생각보다 가깝다. 우리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래 소진되고, 오래 흉내 내고, 오래 들키지 않기 위해 웃다 보면 —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찾아온다. 요조가 특별히 약한 것이 아니다. 그는 조금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먼저 무너진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기록으로 남는다. 설명되지 않은 삶, 정리되지 않은 감정, 끝내 언어가 되지 못한 존재.


결국 이 소설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지금 침묵을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와 있는가.


그리고 만약 이 질문이 더 이상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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