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구하지 않는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탓한 적이 있다면

by Jwook

같은 소설, 다른 사람


20대가 되던 무렵, 무라카미 하루키는 읽어야만 하는 작가였다. 정확히는 — 읽지 않으면 누구와도 대화가 안 될 것 같은 압박감 같은 것이 있었다. 밀란 쿤데라도 그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지 않은 사람과는 무언가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은, 그 시절 특유의 문학적 강박 같은 것.


그 시절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경험치 자체가 작았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년이 되어 다시 펼친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책이 되어 있었다. 이후 그의 소설 대부분을 읽었고, 앞서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더글라스 케네디와는 결이 다르지만 주저 없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다. 아마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소설이 이토록 오랫동안 한국 독자 곁에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게 읽히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같은 문장인데 사람마다,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자신의 기억과 겹쳐지면서 전혀 다르게 읽힌다. 20대의 나는 이 소설에서 젊음과 사랑과 상실을 보았는데, 중년의 나는 전혀 다른 것을 보았다. 와타나베가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의 침묵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누군가 무너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가.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데 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은데 내밀지 못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본 경험. 나중에 혼자 남았을 때 그 침묵이 떠오르면서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무너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다. 편지를 쓰고, 찾아가고,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끝내 그녀를 구하지 않는다.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독자는 계속 기다린다, 그가 무언가를 하기를. 그러나 그는 끝내 하지 않는다.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오코의 고통은 어딘가에서 '해결'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이유를 특정할 수 없고, 처방을 내릴 수도 없으며, 더 많은 사랑이 주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상처는 그녀 안쪽에 있는 것이어서, 타인이 완전히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와타나베는 그것을 안다. 아니, 안다기보다 — 느낀다.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그녀가 서 있는 곳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 그것이야말로 때로는 폭력이 된다. 구하려는 행위가 실은 타인의 고통을 '해결 가능한 문제'로 축소하는 일일 수 있고, 혹은 더 솔직하게는 상대를 구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욕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삶을, 그녀의 침묵을, 그녀의 것으로 남겨둔다.


우리도 그런 순간이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그것이 닿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 때. 그 자리에서 흔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손을 뻗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침묵을 오래도록 짊어지거나.


가벼움 속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반면 미도리는 삶의 에너지로 가득 찬 인물이다. 현실적이고, 솔직하고, 지금 이 순간을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으로,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때 그를 지금 여기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가벼움 속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내부에는 이미 죽음이 너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의 죽음, 나오코의 시간, 젊음이라는 계절이 원래 품고 있는 막연한 불안 — 그는 그 무게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어느 쪽으로도 달려가지 않는다.


나오코의 어둠 속에도, 미도리의 빛 속에도. 그것은 양쪽 모두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함부로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이 멈춤은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척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소설의 마지막, 와타나베는 전화 부스에 서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가 묻는다. "지금 어디 있어?" 그는 세계의 한가운데 어딘가에 있다고만 말할 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이 장면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는 결국 어디에도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거기 서 있다. 전화를 끊지 않고,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정확하게 말한다. 모르겠다고.


중년이 되어 이 장면을 다시 읽었을 때, 20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대답이라는 것,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서 계속 서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구원과 동일시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를 구해야 하고, 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누군가 곁에서 무너질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게 된다.


그러나 와타나베가 보여주는 것은 다른 가능성이다. 어떤 고통은 타인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 그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것 — 그것 역시 하나의 윤리일 수 있다.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언제나 비겁함은 아니다. 때로는 상대의 삶을 상대의 것으로 끝까지 존중하는 일이다.


침묵했던 그날의 자신을 아직도 탓하고 있다면, 한 번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인가.


그 두 가지는 같지 않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