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처』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by Jwook

침묵의 무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싫다고 해야 할 순간에 침묵했고, 원한다고 말해야 할 때 삼켰다. 그 후에는 어김없이 같은 감정이 따라붙었다. '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살아보니 그 침묵이 반드시 나약함의 증거는 아니었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니면 그냥 자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포기가 아니다. 가장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선택하는 방식이다.


한 작가와의 인연


더글라스 케네디를 처음 만난 건 『빅 픽처』였다. 그의 소설은 소위 말하는 '순문학'의 무게감보다는, 몰입감과 속도감을 지닌 대중소설에 가깝다. 이후로 서점에 갈 때마다 그의 이름을 먼저 찾았다. 신간이든 오래된 작품이든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템테이션』, 『더 잡』, 『위험한 관계』, 『오후의 이자벨』를 거쳐 최근의 『원더풀 랜드』까지. 그렇게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을 사고 읽었다. 심지어 그가 쓴 에세이와 동화까지 찾아 읽었을 정도니까.


가끔 인터뷰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가 소설에서 반복하는 것은 결국 하나였다. 선택과,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삶에 내려앉는 무게.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말하면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아서, 오히려 침묵을 선택했던 밤들. 케네디의 인물들은 늘 그 지점에 서 있었다. 선택의 벼랑 앞에서 말하지 못한 채 버티는 사람들. 잘 읽힌다는 건 단순히 문장이 매끄럽다는 뜻이 아니다. 그 서사가 내가 살면서 삼켜온 것들과 주파수가 맞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주파수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왜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침묵 안에 무엇이 있는가.


평범함이라는 가장 치열한 목표


나는 어릴적부터 특별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평범한 직장, 따뜻한 가정, 안정된 일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살아보니 평범함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일이 안정되면 마음이 흔들리고, 가족이 평온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말들, 떠나고 싶었지만 남기로 했던 순간들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평범함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자리에 서는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가 짧은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브런치에 문장을 남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완벽한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있는 삶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오래 침묵했던 한 남자


『빅 픽처』는 그 침묵에서 시작된다. 성공한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 안정된 직장과 가정, 사회적 지위. 겉으로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래전 포기했던 사진작가의 꿈이 있었다. 그 갈망을 그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동료에게도,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사라진 건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그것은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굳어갔다. 그리고 결국 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다. 벤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삶을 선택한다. 오랜 침묵 끝에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용기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설은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정말 용기 있는 선택은 떠나는 것일까, 아니면 떠나지 않는 것일까.


벤이 얻은 것은 자유였다. 그러나 잃은 것은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다. 더 이상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 그가 떠난 자리에는 떠나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용기가 없어서 남은 것이 아니었다.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기로 한 것이었다. 벤은 그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침묵하며 지켜왔던 삶이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케네디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에서 끊임없이 되묻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온 것들의 무게.


떠나지 않는다는 윤리


일상은 반복적이고 답답하다. 침묵이 쌓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비난하게 된다. 사회가 때로 거든다. 침묵은 방관이고, 중립은 비겁함이라고.


그러나 떠나지 않는 사람은 방향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무게를 견디고 있는 것이다. 관계의 무게, 책임의 무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낸 것들의 무게를. 그 선택은 수동적이지 않다. 매우 능동적인 윤리적 결단에 가깝다.


케네디의 소설들이 자꾸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선택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삶에 어떤 무게로 내려앉는지를 성실하게 따라간다.


고요한 싸움


평범함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매일 찾아오는 흔들림 속에서도 다시 자리에 서는 선택이다. 때로는 말하지 않고, 때로는 욕심을 내려놓고, 때로는 떠날 수 있음에도 남기로 결심하는 순간들의 축적이다.


우리는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떠나지 않기로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진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평범함을 지켜내기 위해 매일 조용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


그 고요한 싸움이 모여, 각자의 삶이라는 진짜 '빅 픽처'를 완성해간다. 침묵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난해온 당신에게. 그 침묵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당신이 지켜낸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만큼은,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봐도 좋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