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페스트』, 리유라는 태도에 대하여
비 오는 저녁, 길에서 넘어진 사람을 조용히 일으켜 세워준 누군가를 본 적이 있다. 그는 감사 인사를 듣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다. 같은 날 소셜미디어에는 ‘선행 챌린지’ 영상이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오래 기억하는가. 기억은 종종 행위의 본질이 아니라 보여지는 방식의 정치성에 의해 좌우된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속 의사 리유는 전자와 같은 사람이다. 도시가 전염병으로 봉쇄될 때,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환자들을 돌본다. 그러나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 그의 헌신을 칭찬하자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라 의사일 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태도다. 그는 영웅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위기의 순간, 사회는 늘 영웅을 요구한다. 그러나 리유는 그 명명 자체를 거부한다. 영웅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행동은 윤리가 아니라 서사가 된다.
영웅 서사는 행동을 특별하게 만들고, 특별한 행동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를 예외로 분류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이것이 영웅주의가 만드는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책임의 외주화. 우리는 영웅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무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얻는다.
팬데믹 초기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방호복을 입고 병동으로 향하는 의료진의 사진이 연일 뉴스를 장식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이라 불렀고,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서사가 완성되는 순간, 구조적 질문은 희미해졌다. 왜 보호 장비가 부족했는가, 왜 간호사 한 명이 그토록 많은 환자를 감당해야 했는가, 왜 공공의료 체계는 그렇게까지 취약했는가. 영웅이 있으니 시스템은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 영웅 서사는 때때로 가장 효과적인 면죄부가 된다.
리유는 이 구조를 처음부터 거부한다. 영웅으로 호명되는 순간 자신이 예외적 존재가 되고, 예외적 존재의 행동은 보통 사람에게 면제권을 준다는 것을 그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자신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누구나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카뮈가 보여준 윤리다. 선함은 결심이 아니라 반복이며, 숭고함은 결단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생각.
리유는 연설하지 않는다.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환자를 진료하고, 사망 시간을 기록하고, 다시 다음 환자에게 간다. 환자가 죽을 때마다 그는 잠깐 얼굴을 돌린다. 익숙해지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기 위해서다.
소설 속 타루는 리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견디느냐고. 리유의 대답은 짧다. 그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행동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닌 태도, 카뮈가 말한 부조리 속의 성실함이다. 세계가 무의미하더라도 인간은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연대의 윤리다.
그의 침묵은 무기력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단단한 의지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행동을 주장 대신 증거로 남긴다. 의미는 타인의 박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고, 그의 행동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걸린다. 침묵이 언제나 저항이 될 수 있는가.
리유의 침묵은 행동 중의 침묵이다. 그는 말하는 대신 진료했고, 선언하는 대신 기록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른 침묵들을 생각해 보면, 회의실에서 잘못된 방향이 제시될 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순간, SNS에서 부당한 장면을 보면서도 그냥 다음 화면으로 넘기는 순간, 옆자리 동료가 서서히 무너지는 사실을 알면서도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침묵은 종종 ‘신중함’이나 ‘분위기 파악’이라는 이름을 갖지만, 리유의 침묵과는 성격이 다르다. 행동 없는 자리에서 말마저 사라진, 집단적 방조의 빈자리다.
두 침묵을 가르는 것은 단순히 행동의 유무가 아니다. 그 침묵이 어떤 관계적 책임을 기반으로 선택되었는가다. 리유는 혼자 일하지 않았다. 기자 타루, 공무원 그랑, 여행자 랑베르와 함께 자발적 방역 조직을 만들었다. 지도자도 없고, 구호도 없고, 위계도 없는 조직. 다만 “해야 할 일”에 대한 공유된 이해만 있었다. 침묵하는 개인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집합적 힘이 된 것이다.
홀로 조용한 것과 함께 조용한 것은 다르다. 리유의 침묵은 고립이 아니라, 불필요한 말을 걷어낸 연결이었다.
리유의 진료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단순히 치료가 이루어지는 기능적 공간이 아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같은 절차로 환자를 맞이하고, 같은 성실함으로 기록하는 행위가 쌓여 그 공간의 성격을 만들어간다.
건축과 철학에서 이것을 ‘거주(dwelling)’라고 부른다. 하이데거가 “건축–거주–사유(Bauen–Wohnen–Denken)”에서 말한 의미의 거주—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돌보고 보살핌으로써 장소와 관계를 맺는 방식. 리유는 진료실을 거주한다. 매일의 반복 행위를 통해 그 공간에 윤리적 밀도를 부여한다. 페스트라는 혼돈이 도시 전체를 비장소(non-place)로 만들어가는 동안, 리유의 진료실만은 의미가 축적되는 장소로 남는다.
우리 각자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교실, 병원, 공장, 사무실, 가정. 공간은 처음부터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반복되는 행위와 관계가 그것을 장소로 만든다. 리유의 진료실이 페스트 한가운데서도 윤리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공간이 매일의 반복을 통해 그런 성격을 서서히 획득했기 때문이다. 영웅적 순간이 공간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이 공간을 지킨다.
『페스트』는 전염병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선택의 이야기다. 위기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는다. 리유는 거창한 결심을 하지 않는다. 대신 매일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도망치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선택.
그래서 그는 영웅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오래 기억된다. 영웅은 사건이 끝나면 사라지지만, 태도는 시간이 지나도 남기 때문이다. 카뮈가 리유를 통해 보여준 것은 영웅이 아니라 기준이다. 세상이 흔들릴 때 인간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조용한 좌표.
그런데 이 좌표를 따라가려는 사람은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인정받을 가능성이다. 리유처럼 산다는 것은 영웅 서사 바깥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보여지지 않음을, 기억되지 않음을, 때로는 오해받음을 감수하는 삶이다. 오늘 우리는 영웅을 요구하는 구조 속에서 자기 책임의 범위를 축소하도록 유혹받는다. 그렇기에 리유의 태도는, 그 구조에서 벗어나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어려운 방식이다. 카뮈가 우리에게 진짜로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
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쉬워서는 안 된다. 리유처럼, 말없이, 그러나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