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온천 목욕탕에서
가끔 유성온천 목욕탕에 간다. 대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가봤을 법한 곳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녹고, 사우나 문을 나설 때마다 세상이 조금은 덜 버겁게 느껴진다.
이곳은 찜질방 문화가 퍼지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처음 들어섰던 그 목욕탕이다. 유성의 오래된 온천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목욕탕엔 유독 어르신들이 많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담소를 나누고, 느릿한 걸음으로 탕을 오간다. 가끔은 미끄러운 바닥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왜 목욕탕에는 어르신들이 이렇게 많을까."
노화로 굳은 근육을 풀기 위해서일 수도, 평생의 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 이곳은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마지막 기억'처럼 느껴졌다. 서로의 등을 맡기고 몸을 씻겨주는 행위는 단순한 위생을 넘어선 '연대의 풍경'이었다.
찜질방이 젊은이들과 가족 단위의 활기 넘치는 공간이라면, 남아 있는 대중목욕탕은 어르신들의 안식처다. 그곳에서 그들은 함께 모여 땀을 흘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행위는 단순한 도움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따뜻한 연대다.
대중버스도 마찬가지다. 한산한 오후, 버스 안은 어르신들로 가득하다. 천천히 오르는 발걸음, 교통카드를 찾느라 허둥대는 손, 손잡이를 꼭 쥐고 자리를 찾아가는 뒷모습.
요즘 국가는 고령 운전자의 면허를 조기 반납시키려 한다. 안전을 위한 조치지만, 그건 곧 어르신들의 이동권을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다. 차를 잃은 어르신은 버스에 의지하고, 버스는 점점 느려진다.
공원의 벤치는 예전엔 길게 이어진 나무 의자였지만, 이제는 팔걸이가 박힌 개인 좌석이다. 언뜻 보면 “개인 공간의 배려” 같지만, 실은 “누울 수 없게 만든 설계”다.
지하철역 계단은 가파르고, 엘리베이터는 멀리 있다. 횡단보도 신호는 빠르게 바뀌고, 은행 창구는 사라지고 무인 단말기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건축에서는 이런 설계를 ‘적대적 건축(Hostile Architecture)’이라 부른다. 노숙인을 막기 위해 만든 구조지만, 그 불편함은 결국 노인·장애인·임산부·아이를 돌보는 사람 모두에게 향한다.
도시는 점점 빠르고, 효율적이며, 비인간적으로 진화한다.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시는 ‘환대’가 아닌 ‘배제의 공간’이 되어간다.
우리의 일상이 된 키오스크도 마찬가지다. 패스트푸드점, 병원, 심지어 목욕탕 입구에도 키오스크가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편리함이지만, 노인에게는 두려움이다. 카드를 어디에 넣는지, 메뉴는 어디서 고르는지 헤매다 뒤의 시선을 느끼면 결국 “됐어요” 하며 물러선다. 존엄이 깎이는 순간이다.
디지털 전환은 효율을 약속하지만, 그 효율의 이면엔 누군가의 배제가 있다. 키오스크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 공간은 당신을 위한 곳이 아니다”라는 무언의 선언이다.
이에 맞서는 개념이 있다. 건축가 로널드 메이스(Ronald Mace)가 제안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나이, 능력,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자는 철학이다. 레버형 손잡이, 단차 없는 출입구, 자연스러운 경사로와 넓은 복도.
이런 설계는 노인만을 위한 게 아니다. 유모차를 끄는 부모, 짐을 든 사람, 일시적으로 다친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즉, 모두를 위한 공간이 곧 더 아름다운 공간이다.
서울시는 2020년부터 공공건물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의무 적용하기 시작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경사로와 자동문, 단차 없는 출입구로 “건물 자체가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이 철학이 ‘선택’에 머문다.
건축가가 아무리 제안해도 건축주가 원치 않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결국 도시 설계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다. 우리는 누구를 환대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 그 선택이 콘크리트와 강철로 굳어진다.
한때 노인은 마을의 중심이었다. 경험이 곧 지식이던 시절, 노년은 경청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인은 사회에서 점점 불편한 존재가 되어간다. 젊은 세대는 노인을 ‘꼰대’라 부르고, 버스에서 부딪히면 짜증이 먼저 난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존재가 ‘방해물’로 취급된다.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은 교과서 속 문장으로만 남았다.
이건 단순한 세대 갈등이 아니다. 우리가 ‘늙음’이라는 미래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다.
버스 안 어르신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것이다. 면허를 반납하고, 손잡이를 꼭 쥐고, 누군가의 짜증 섞인 시선을 받으며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 생각은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나는 지금,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뛸 수 있을 때 뛰며, 사유할 수 있을 때 생각한다.
노년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 또한 존중을 갉아먹는다. 노인의 빈곤율은 청년 세대의 4배에 달한다. 청년은 주거비와 학자금에 짓눌리고, 노인은 연금과 자산으로 기득권으로 오해받는다. 서로의 현실을 모르는 채 “기득권 대 피해자”의 프레임만 남는다.
하지만 실상은 양쪽 모두 구조적 문제의 희생자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지금, 우리는 속도만을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 돌봄을 외면하는 복지 제도,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미디어 속에서 살고 있다. 2050년이 되면 생산가능인구 1.5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결국 우리가 지금 노인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 자신이 늙었을 때 받게 될 대우가 될 것이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폭력과 혼돈 속에서 ‘과거의 도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를 그렸다.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은 정의로 세상을 버텨왔지만, 시대의 잔혹함 앞에 점점 무력해진다. 영화의 제목은 단지 늙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적 가치가 설 자리를 잃은 시대, 존중이 사라진 세상을 뜻한다. 벨은 마지막에 고백한다. “이젠 세상이 너무 낯설다.” 그 말은 곧, 우리 모두 언젠가 시대의 속도에 밀려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예언이다.
최근 개봉작 폴 토마스 앤더슨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는 정반대의 노인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Christmas Adventurers Club)’— 크리스마스를 숭배하는 백인 우월주의 조직의 노인 엘리트들. 그들은 가짜 사냥 배경 앞에서 권력을 탐하고, 순수함을 명분으로 폭력을 저지른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늙음이 어떻게 극단과 혐오로 변해가는가”에 대한 풍자라 읽는다. 한쪽엔 시대를 잃은 선한 노인이 있고, 다른 한쪽엔 시대를 거스르는 악한 노인이 있다.
두 영화가 묻는다. “노인은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사회가 늙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존중은 사라지고, 두려움만 남았다.
온천의 김 서린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이마의 주름과 느려진 몸을 본다. 버스 창가에 비친 내 모습에서도 같은 장면을 본다. 그건 어쩌면 미래의 나일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건 불편해지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의 거울이다. 그 거울을 마주본 사람은 현재를 다르게 산다.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며, 생각할 수 있을 때 사유한다.
노년은 두려움이 아니라 예고편이다. 그 예고편을 미리 본 사람은, 현재를 조금 더 다정하게 산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했다. “존재보다 먼저 오는 것은 타인의 얼굴이다.” 노인의 얼굴은 주름이 아니라 시간의 지도다. 그 얼굴 앞에서 우리가 짜증과 무시로 응답한다면, 그것은 윤리의 실패다.
노인을 존중하는 사회란,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사회다. 타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자신의 미래 또한 존중하지 못한다.
목욕탕의 뜨거운 물속에서 사람들은 잠시 세상의 냉기를 씻어낸다. 그 풍경에는 세대의 구분이 없다. 다만 인간이 인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을지 몰라도, 노인을 위한 존중은 아직 만들 수 있다.” 그건 제도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그래서 오늘 나는, 탕 안에서 마주친 한 어르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저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생각 속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존중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