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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pace and Time

시간의 아우라

류자쿤과 사라지지 않는 공간

by Jwook

도시의 잔상, 멈추지 않는 기억의 건축가


도시를 걷다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멈추는 건물이 있다.

그곳은 화려하지도,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지만 묘하게 오래 남는다.


그 벽에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고, 누군가의 손끝과 체온이 스며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깨닫는다 —건축은 단순히 ‘짓는 행위’가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일이라는 것을.


중국 건축가 류자쿤(Liu Jiakun, 刘家琨) 은 그런 ‘살아 있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다.

올해 2025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그는, 도시의 속도와 경쟁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삶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은 1979년 하얏트 재단이 제정한 세계 최고 권위의 건축상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창의성과 인류 사회에 대한 공헌을 기준으로 매년 한 명(또는 팀)의 건축가에게 수여된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인 수상자는 없다.

전통과 현대, 공동체와 도시성, 기억과 재생의 경계에서 인간 중심의 건축을 실천해온 그는, 화려한 조형미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상처를 품는 공간을 추구한다.


2008년 쓰촨 대지진 이후, 그는 무너진 마을 위에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아갈 수 있는 공간, 즉 공동체의 재건을 선택했다.


그는 폐허가 된 지역에 임시 거처와 학교, 회관을 세우며 ‘함께 사는 힘’을 복원하는 건축을 실천했다.
그의 설계는 효율이나 상징보다 삶의 지속성을 우선했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벽돌을 쌓고 나무를 세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은 세상을 바꾸지 않지만, 사람이 다시 세상을 믿게 만들 수 있다.”


이후 그는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도시 단위의 회복을 꿈꾸는 프로젝트로 나아갔다. 청두(成都)의 West Village 복합단지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곳은 주거·상업·체육·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거대한 마당형 커뮤니티로, 사람들이 걷고, 대화하고,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열린 도시’를 구현했다.


그의 건축은 상처를 덮지 않는다. 대신 그 속에 숨 쉴 틈을 남긴다.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다시 연결된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청두(成都)에 위치한 West Village 복합단지 전경(2015), 건물·자전거길·보행로·공공광장을 통합한 대규모 커뮤니티 복합공간, 출처: vmspace.com

복제된 시대, 사라지는 ‘진짜’의 힘


류자쿤의 건축을 이해하려면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의 사유를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20세기 초, 예술이 대량으로 복제되면서 ‘진짜’가 가진 고유한 힘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가 말한 ‘아우라(Aura)’ “단 한 번만 존재하는 경험”, 다시는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떨림이다.


빛, 공기, 온도, 거리감, 그리고 시간의 무게.

이 모든 요소가 교차할 때 하나의 공간은 자신만의 ‘존재감’을 갖는다.

바로 그것이 아우라다.


하지만 오늘날의 도시는 다르다.

복제된 유리벽, 매끈한 콘크리트,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표준화된 건물들.

완벽하지만, 감정이 남지 않는다.

편리하지만, 기억이 정착할 틈이 없다.

사진: Unsplash의 Kelvin Zyteng

류자쿤은 그 ‘복제의 도시’에서 사라진 아우라를 되살리는 건축가다.


균열, 그림자, 그리고 시간의 밀도


그의 건물에는 완벽한 선도, 대칭도 없다.

대신 균열, 그림자, 손의 흔적, 바람이 드나드는 틈이 있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시간이 머무른다.

그의 건축은 새로 지었지만 오래된 듯 보이고, 단단하지만 동시에 부드럽다.


청두의 Luyeyuan Stone Sculpture Museum은 그 미학의 정수다.

거친 콘크리트 틈 사이로 흘러드는 빛이 돌 조각의 질감과 공기의 밀도를 한 장면에 담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벽에 새겨진 시간과 마주 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빛이 아니라, 시간이 새어 들어오는 박물관, Luyeyuan Stone Sculpture Museum(2002), 출처: arquitecturaviva.com

소주의 Imperial Kiln Brick Museum 또한 수백 년 전 가마에서 구워진 벽돌과 현대 구조가 만나는 공간이다.

그 안에는 전통과 현재, 새로움과 낡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의 시간이 흐른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는 대신,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비추는 틈을 설계한다.

시간의 겹침을 시각화한 공간, Suzhou Museum of Imperial Kiln Brick (2016), 출처: world-architects.com

아우라, 거리감과 느림의 미학

베냐민은 말했다.


“아우라는 거리감 속에서 태어난다.”


류자쿤의 건축도 그렇다.

그의 공간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멀리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 사이의 미묘한 간격, 그 ‘거리감’이 바로 아우라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건축을 소비하는 관객이 아니라, 느끼는 주체로 깨어난다. 벽의 거친 질감, 그림자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 그 모든 감각이 하나의 경험이 된다.

그의 건축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시간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그래서 그의 공간은 조금 느리고, 조금 따뜻하다.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자신만의 리듬을 되찾는다.


류자쿤의 건축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은 완벽함이 아니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간의 흔적이다.”


그의 건축은 그 흔적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기억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베냐민이 슬퍼했던 복제의 시대에, 류자쿤은 묻는다.

“빛은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이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의 틈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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