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시네마 이야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가 마음을 건드렸다.
“당신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나요, 아니면 영화가 당신을 보고 있나요?”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나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영화는 끝났는데, 그 시간은 아직 내 안에서 흐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말한 ‘사유를 촉발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나를 붙잡고, 내 시간을 흔들며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험.
들뢰즈는 『시네마 1: 운동-이미지』에서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구조를 분석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떠올려보자.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행동의 연쇄다. 추격-충돌-탈출-다시 추격. 인물은 상황을 인식하고, 즉각 반응하며, 그 행동이 다음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다크 나이트》도 마찬가지다. 조커의 계획-배트맨의 대응-시민의 선택. 모든 장면이 원인과 결과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런 구조를 ‘감각-운동 도식’이라고 불렀다. 인물이 상황을 지각하고(감각), 그에 따라 움직이며(운동), 세계를 변화시킨다.
운동-이미지의 세계에서는 행동이 의미를 만든다. 세상은 이해 가능하고, 노력하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관객은 주인공과 함께 달리고, 싸우고, 승리한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극장을 나선다.
하지만 역사는 영화를 바꿔놓았다. 들뢰즈가 주목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 설명할 수 없는 죽음, 돌아갈 수 없는 일상. 전쟁 이후 유럽의 영화감독들은 더 이상 “행동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들이 담은 건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폐허 속을 걷는 사람들,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 목적 없이 떠도는 일상이었다. 행동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화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들뢰즈는 『시네마 2: 시간-이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영화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면 서사가 흩어진다. 우주의 탄생, 소년의 기억, 어머니의 기도가 뒤섞이며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보다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느껴지는가?”가 중요해진다.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은 명확한 목표가 없다. 그저 광활한 미국 서부를 떠돈다. 카메라는 풍경을 오래 비추고, 짧은 만남들이 반복되며, 시간은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리듬으로 흐른다. 영화가 끝나도 우리는 “그래서 뭐가 해결됐지?“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그 고요함이, 그 시간이 우리 안에 남는다.
들뢰즈는 이런 이미지를 ‘크리스탈-이미지’라고 불렀다. 과거와 현재, 실제와 가상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공존하는 순간.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의 기억이 지워지는 장면들처럼, 사라지는 순간과 붙잡으려는 순간이 동시에 펼쳐질 때,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다.
운동-이미지는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시간-이미지는 우리에게 멈춰서 바라보라고 한다.
전자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들고, 후자는 이야기가 끊긴 자리에 머무르게 한다.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만약’의 시간 속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의 시선이 교차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스토리를 쫓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여운 속에서 생각한다.
들뢰즈는 말한다.
“영화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생성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것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사유다. 철학이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영화는 이미지로 생각한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언어가 되지 않는 기억, 아직 오지 않은 시간. 그것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를 때, 우리는 영화 안에서 사유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15초짜리 릴스와 1분짜리 숏폼을 소비한다. 빠른 컷, 강렬한 음악, 명확한 메시지. 그런데 이것은 운동-이미지일까? 들뢰즈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감각도, 운동도 없는 순수 자극의 파편.”
행동으로 이어지지도, 시간을 체험하게 하지도 않는 이미지. 그저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흐름.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다르다. 목적 없는 산책, 설명할 수 없는 우울, 멍하니 바라본 하늘. 그것이 들뢰즈가 말한 시간-이미지의 세계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어떤 이미지가 당신을 붙잡았는가?”
“그 이미지 속에서, 당신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익숙한 영화를 다시 봐도 좋다. 이번엔 스토리를 따라가지 말고, 이미지에 머물러 보자. 한 장면이 왜 오래 이어지는지, 왜 말이 없는지, 왜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지. 그 속에서 우리는 생각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할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하는 일 자체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그것이 철학도, 문학도 아닌,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사유다.
그리고 사유는, 늘 그렇게 작은 멈춤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발견한 철학의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