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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enses of Time

공감의 거리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아

by Jwook

어릴 적부터 우리는 공감이 좋은 것이라 배웠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 봐”, “공감이 중요해.” 마치 모든 갈등은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고, 공감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공감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순간, 오히려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와 거리가 더 도드라질 때가 있다. 내가 보지 못한 풍경, 겪어보지 못한 고통의 깊이 앞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입을 다물고, 눈을 피하고, 때로는 말조차 꺼내지 못한다.


유사함의 함정


우리는 대개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더 쉽게 마음을 연다. 비슷한 경험, 비슷한 상처, 비슷한 언어.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말은 공감의 출입문처럼 쓰인다.


하지만 이 유사함은 공감을 복제의 감정으로 축소시킨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닮은 부분만을 붙잡고 내 경험 안으로 타인을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보자. 이직을 고민하는 후배에게 “나도 예전에 그랬어. 그냥 버텨”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의 고민을 듣지 않는다. 내 과거를 투사할 뿐이다. 그의 직장 환경, 그가 느끼는 압박감의 구체적 결, 그의 내일에 대한 불안은 나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말한다. “다 그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쉽게 말해, 그 사람을 이해한 게 아니라 나의 경험을 복제해 덧씌운 것에 가까운 일이다. 진정한 공감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만 열리는 감정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열려 있으려는 윤리적 결심이다. 그것은 닮은 점을 찾는 일이 아니라, 다름 앞에서 멈춰 서는 용기다.

한여름밤의 꿈 (1939) 공감은 이해보다 상상의 힘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의 사랑이, 한 꿈 속에서 이어진다. 마르크 샤갈 © Musée de Grenoble

감정의 소비로 전락한 공감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공감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현대 사회는 타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뉴스에서 전쟁과 재난을 보고 마음 아파하지만, 거리에서 마주친 난민, 노숙인, 이방인에게는 쉽게 시선을 거둔다.


공감은 ‘좋은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소비된다. 우리는 감동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만, 그 감정은 곧 스크롤 아래로 사라진다.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공유하는 순간 우리는 공감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클릭 이후, 타자의 고통은 우리 삶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렇게 공감이 감정의 일시적 소비로 그칠 때, 그 안엔 윤리적 책임이 없다. 진짜 공감은 타자의 고통을 내 감정의 일부처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의 존재를 나의 세계 안에 ‘남겨두는 것’이다. 체험은 순간이지만, 남겨둠은 태도다. 그것은 내일도, 모레도 그 사람의 고통을 기억하고, 내 삶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는 의지를 포함한다.

에펠탑의 약혼자들 (1936–1939) 서로의 세계를 배경 삼아, 두 마음이 한 빛으로 물든다. 마르크 샤갈 ©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Paris

이해할 수 없음에서 시작되는 감정


우리는 종종 말한다.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어.” “난 도무지 납득이 안 돼.” 공감은 ‘이해’라는 문턱에 걸려 자주 멈춘다. 하지만 진짜 공감은, 이해 너머에서 시작된다.


“나는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너의 고통이 나에게 닿는다.” 이 문장은 불완전하지만 더 깊은 공감의 방식이다. 타인을 내 방식으로 재단하지 않고, 그의 고통을 나의 경험으로 축소하지 않는 방식이다.


직장에서 세대 차이를 느낄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쉽게 말한다. “요즘 애들은 이해가 안 돼. 왜 저렇게 쉽게 그만두지?”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이해 불가능하다는 결론부터 내린다. 진짜 공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네 세대의 경험을 모르지만, 네가 느끼는 불안은 진짜구나. 내가 겪었던 불안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


이러한 공감은 존재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곁에 있겠다는 겸손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세계관을 존중하면서도, 나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정직함이기도 하다.

보카치오 이야기: 두꺼비 (1949–1950) 말보다 감정이 먼저 닿는 거리. 달빛 아래 두 마음이 스며든다. 마르크 샤갈 © ADAGP, Paris

거리 두기 속의 공감


공감은 가까워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론 적절한 거리가 공감을 더 깊게 만든다. 밀착해서 함께 무너지는 것도, 멀찍이 떨어져 외면하는 것도 진정한 공감은 아니다.


성숙한 공감은 상대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배려다. “나는 너를 돕고 싶지만, 너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게.” 이 절제된 태도 안에 깊은 윤리가 있다.


슬픔에 빠진 친구 앞에서 우리는 무언가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힌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때로는 “괜찮아질 거야”라며 그의 슬픔을 성급히 봉합하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충동보다, 그저 존재를 함께 견디고 싶은 마음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적절한 거리란, 상대가 숨 쉴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다. 내 방식으로 그를 구하려 들지 않고, 그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곁에서 기다리는 인내다. 이 거리는 무관심이 아니라, 상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신뢰의 표현이다.

푸른 풍경 속의 연인들 (1969–1971) 사랑은 푸른 빛처럼, 멀어져도 서로를 비춘다. 마르크 샤갈 © ADAGP, Paris

공감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다


공감은 이해력이 아니라 겸손이다. “나는 너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너의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것은 판단을 미루고, 타인의 얼굴 앞에서 잠시 멈추는 행위다. 그리고 그 멈춤 안에서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는 조용한 결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이라 불렀다.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를 나의 범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공감은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모르겠지만, 들어볼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공감을 감정에서 윤리로 바꾼다. 감정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윤리는 타자를 향해 열린 문이다.

도시 위에서 (1917) 이해보다 깊은 감응의 언어. 공감은 서로를 들어 올리는 힘이다. 마르크 샤갈 © Tretyakov Gallery, Moscow

마무리 — 낯선 존재에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모두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짜 공감은 내가 아는 범위를 넘어서는 타자의 세계에 작은 창을 열어두는 일이다.


그 창은 불완전하고, 때론 낯설고, 온전히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창 너머에서 우리는 진짜 사람을 만난다. 나와 같지 않기에 더 소중한,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기에 더 존중받아야 할 존재를.


오늘 하루, 누군가와 의견이 다를 때 설득하려 하기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 번만 더 물어보자. 완벽히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거리를 기억하자.


그 멈춤과 거리가, 공감이 감정이 아닌 윤리로 변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타인을 만난다.

분홍빛 연인들 (1916) 사랑은 말보다 온기로 남는다. 두 볼이 맞닿는 순간, 세계가 멈춘다. 마르크 샤갈 © ADAGP,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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