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 예술의 문법을 바꾸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세상이 너무 완벽하게 정리된 것 같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더 이상 움직일 틈이 없어 보일 때 — 그때 누군가 그 표면에 작은 금을 낸다.
그 균열 사이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새어 나온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뉴턴의 사과가 중력을 발견했을 때, 아인슈타인이 시간을 휘게 했을 때, 카프카가 인간을 벌레로 바꿨을 때,
르 코르뷔지에가 건물을 땅에서 띄웠을 때 — 세계는 그렇게 균열을 통해 다시 쓰였다.
예술사에서 그 균열의 중심에 선 사람은 마르셀 뒤샹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예술은 여전히 붓과 망막의 감옥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단 하나의 제스처로, 존재의 정의를 묻는 철학자의 자리에 올랐다.
2004년, 전 세계 예술가들이 꼽은 20세기 최고의 작품은 피카소의 회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었다.
형태를 해체한 화가보다, 형태 자체를 무화시킨 사상가가 역사의 결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흔히 현대 예술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 어려움의 시작점에 바로 뒤샹의 균열이 있다.
뒤샹의 질문은 허공에서 떨어진 벼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진과 전쟁이 만들어낸 균열 속에서 천천히 익어간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사진의 발명은 예술의 오랜 특권을 무너뜨렸다. 빛이 현실을 기계적으로 포착하자, 그림은 더 이상 '세상을 닮아야 할 이유'를 잃었다.
모네는 대상을 버리고 빛의 흔적을 좇았고, 피카소는 형상을 해체했으며, 칸딘스키는 형태의 마지막 틀을 무너뜨렸다. 이것 역시 균열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캔버스 위에 머물렀다. 예술은 끝내 눈의 영토를 떠나지 못했다.
뒤샹은 이 시각적 집착을 ‘망막적 예술’이라 부르며 거부했다. 그가 원한 것은 더 이상 눈으로 보는 예술이 아니라, 생각으로 작동하는 예술이었다.
1914년, 전쟁이 유럽을 휩쓸었다. 참호 속의 죽음과 폐허는 문명의 믿음을 산산이 부쉈다. 이성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예술은 진실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뒤샹은 붓을 버리고, 가장 평범한 오브제 하나 — 소변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것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가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 한 문장이 예술의 문법을 바꿨다. 창조는 더 이상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선택이 곧 사유가 되었고, 예술가는 손의 노동자가 아니라 개념의 조형자가 되었다.
〈샘〉은 전시에 거부당했다. "누구나 출품할 수 있다"던 협회의 규칙은 단숨에 무너졌다.
이 사건으로 뒤샹은 물었다.
"누가 예술을 결정하는가?"
그는 작품이 아니라 제도를 드러냈다. 예술을 정의하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그것을 승인하는 권력의 맥락이었다.
〈샘〉은 전시되지 못했고, 곧 분실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부재는 더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남긴 한 장의 사진. 그것만으로 〈샘〉은 신화가 되었다.
미술관의 하얀 벽과 조명, 그리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의 시선은 사물을 특별하게 만든다. 뒤샹은 바로 그 ‘특별함’이 사실은 장치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드러냈다.
변기는 전시장 안에서 비로소 〈샘〉이 된다.
〈샘〉은 전시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제도를 심판대에 세웠다.
예술은 더 이상 손끝의 기교가 아니라, 선택과 배치와 승인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은 이제 사물이 아니라 맥락(Context)이 되었다.
그것이 뒤샹이 남긴 가장 날카로운 균열이었다.
그가 연 문은 지금도 닫히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조셉 코수스의 〈하나이자 세 개의 의자〉는 모두 그 균열 위에서 태어났다.
예술은 눈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유의 건축으로 옮겨갔다. 작품은 더 이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질문의 구조물이 되었다.
〈샘〉을 보고 “추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여전히 ‘망막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뒤샹은 아름다움을 묻지 않았다.
그는 우리 시대가 무엇을 예술로 승인하는가를 물었다.
이제 질문은 또 다른 형태로 되살아난다. AI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 창조의 주체는 누구인가.
뒤샹이 오브제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알고리즘에 명령을 내린다. 그 행위는 새로운 선택인가, 혹은 착각된 창조인가.
NFT는 디지털 세계의 ‘원본성’을 다시 세우려 하고, 인스타그램의 수많은 이미지들은 제도의 승인 없이도 예술처럼 소비된다.
뒤샹이 무너뜨린 권위는 정말 사라졌을까,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되살아난 걸까.
예술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예술인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답을 찾는 순간 — 예술은 다시 굳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질문 속에 머무르고 싶다. 다음 균열이 어디서 일어날지 지켜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