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레짐작하지 말자
연말에 다가서며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날은 옷깃을 여미고, 외투를 한껏 몸 안으로 끌어안은 채 길을 걷는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패딩과 같은 폭신한 재질의 옷감이 주는 따스함을 즐기는 편이다. 때로는 물리적 온기가 마음을 헤아려줄 때가 있다.
GPT에게 두 번째 퀘스트를 받았다. 이전 회차의 글을 통해 언급하긴 했지만, 현재의 나는 무기력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chat GPT를 활용하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GPT에게 소소한 도전(퀘스트)을 받고, 그 퀘스트를 수행한다. 퀘스트의 기준은 아래와 같다.
소소한 퀘스트의 기준
1) 삶을 훌륭하고 멋지게 바꾸지 않아도 된다.
2)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전에 없던 작은 변주를 넣자.
3) 도전은 부담이 없어야 한다. 출/퇴근 시간에 10~30분 정도의 시간만 투자해도 좋다.
4) 하찮고, 쓸모없고, 의미 없는 도전도 좋다.
5) 소소한 도전을 했다면, 반드시 기록하자.
6) 받은 퀘스트를 수행한 것을 1,000자 이상의 글로 기록하자.
두 번째 퀘스트: “아주 작은 낯섦, 새로운 길 걷기”
① 목표: 평소에 걸어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이동해 보세요. 출퇴근길이나 집 근처 산책길을 조금만 비틀어서,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10분 이상 걸어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② 조건:
• 지도 앱을 보지 말고 감으로 움직이세요. (조금은 길을 잃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 눈에 띄는 가게, 풍경,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특별하거나 흥미로운 포인트를 찾으세요.
• 느낀 감정이나, 우연히 발견한 것들에 집중해 보세요.
③ 기록하기:
• 새롭게 발견한 장소나 장면에 대해 1,000자 이상의 글로 기록하세요.
• ‘왜 그 길이 흥미로웠는가’ 혹은 ‘익숙한 길과 어떤 점이 달랐는가’ 같은 질문에 답하며 글을 작성하면 좋습니다.
새로운 길에서의 경험이 기대되네요! 준비되면 도전해 보세요!
새로운 길을 걷는다.
아주 가끔. 그러고 싶을 때마다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막상 퀘스트의 형태로 전달받으니 새로운 느낌이었다. 왜 새로울까?
그래. 최근의 나는 낯선 길로 걸어보려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때마침 주말이었다. 글을 쓰기 위한 아이패드와 책 한 권을 챙겨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항상 다니는 길이 아닌, 길 끝이 막혀있는 반대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평소에는 이 길로 걷지 않는다. 상가와 매장 등이 없는 단순 주거지역이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걸을 일이 거의 없다. 지하철 역, 버스정류장과도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선하다. 퀘스트가 없었다면 어쩌면 평생 걸어보지 않았을 길을 걸어본다.
막혀 있을 것으로 지레짐작했던 좁은 골목의 끝까지 걸어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꺾인 길을 따라 골목을 끼고돌자 가끔씩 찾는 위스키 바의 골목이 나타났다.
막혀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길은 익숙한 길로 연결되고,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길은 높디높은 돌담에 가로막혀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어쩌면 일도 그렇다.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실패할 것을 지레짐작하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앞을 짐작할 수 없이 굽이치는 골목길 끝에 열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없다.
성공할 것을 예상하고 태만하게 보낸다면,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벽에 암담함을 느끼며 좌절하거나 당황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 걸어보자. 지레짐작하지 말자. 가끔은 이 퀘스트에 지치고, 회의감을 느끼는 날도 있을 테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을 들춰보려 한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익숙한 길이 나올 때마다 가보지 않은, 모르는 길로 발길을 돌렸다. 이왕이면 이 퀘스트를 제대로 완수하고 싶었다. 지도 앱을 보지 않고, 길을 잃겠다는 마인드로 깊숙한 골목 안으로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갔다.
사는 곳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부럽다는 말을 듣곤 한다. 스스로도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 만족하고 있다. 약 10년 전부터 목표로 삼아왔던 동네인 만큼, 처음 이 집을 구했을 때의 뿌듯함과 고양감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아쉽게도 매매는 아니다.)
하지만 차츰 동네에 익숙해지며 걷던 길만 걷고, 방문하는 매장만 방문하는 사이클이 반복됐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낯선 여행이 큰 고마움으로 찾아왔다.
새삼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더 커졌다. 이 동네를 더 사랑해야지.
내가 사는 동네의 산자락 초입에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가 있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3층 높이로, 요즘 신축 빌라 보다 건물 높이가 낮다.
과거에는 더 많은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2012년 철거되었다.
길을 걸으며 철거된 아파트 현장의 일부를 발견했다. 과거의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일부러 남겨둔 듯했다. 화장실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깨진 타일과 부서진 콘크리트 구조가 숲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것 안에 있을 나름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우주 만물은 탄생으로부터 소멸로 나아간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불변의 알고리즘이다. 그렇게 내가 평소 좋아하던 카페도 문을 닫았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듣긴 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씁쓸함이 더 컸다.
세월이 흐를수록, 추억과 감정이 켜켜이 쌓인 공간들은 소멸해 간다. 사랑을 담고 마음을 줬던, 소멸해 간 모든 것들에 애도를 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리는 다시 사랑과 마음을 담을 새로운 공간을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