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씨 Jul 16. 2024

머리는 새하얗지만, 마음은 새파란

"컴퓨터와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경단녀다.

일 욕심이 있던 젊은 시절, 일부러 정년까지 일할 수 있는 회사에 취업했건만 결혼 후 홀연히 그만두게 되었다. 따져보니 일공백만 200개월이 넘는다. 연초에 우연히 재취업 교육에 참여하게 됐다. 교육장 대표님 말씀이 컴퓨터 실력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고 해서 컴퓨터 수업을 듣게 됐다. 원래는 배움 카드를 써서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려 했지만 재취업 교육과정 중에는 혜택을 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가까운 주민센터 정보화교실에 찾아갔다. 한눈에 봐도 반구십인 내가 가장 젊었고, 머리가 희끗하거나 백발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파일 불러오기를 하나 해보라고 하면 나만 성공하고, 강사님 혼자 열명도 넘는 수강생들을 하나씩 돌며 가르쳐 주느라 흐름이 끊기기 일쑤였다. '나 수업 제대로 들어온 거 맞나?' 기다리다, 졸다가 나중엔 카톡도 봤다. 그러다, 옆자리 어르신 컴퓨터 화면을 슬쩍 보게 됐다. '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데..' INTJ였던 나는 망설이다가 한마디를 툭 했다. "이거 눌러보세요" 어르신은 따라 하시더니 이내 웃으시며 "아휴, 내가 이렇게 못해. 고마워요"라며 쑥스럽게 웃으셨다.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나는 내 짝꿍에게는 곁눈질로 슬쩍슬쩍 알려주기 시작했다. 빨리 배우고픈 욕심에 여러 가지 수업을 들었기에 짝꿍도 여럿이었다. 기술이 늘어, 수업을 들으면서 짝꿍의 작업까지 동시에 봐줄 수 있게 됐다. 짝꿍 어르신들은 나 때문에 번거로워서 어쩌냐 하시면서도 고마워하셨고. 수업이 끝난 후에는 본인의 사는 이야기까지 술술 하셨다.



영상편집 수업 시간, 유난히 나이가 있어 보이시던  짝꿍 할아버님은 영상을 편집해 능숙하게 바로 본인의 유튜브에 올리셨다. 곁눈질로 보니 가족 여행 영상을 담은 영상들이었고 조회수는 대부분 한자리였다. '대체 저걸 왜 올리실까?' 재취업 욕심에 컴퓨터 수업을 듣던 나는 의아했다. 저 연세에 취업하긴 쉽지 않으실 테고, 저런 영상은 사람들이 보지도 않을 텐데 유튜브에 굳이.. 그 수업이 끝날 때쯤 그 이유를 듣게 됐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냐시며, 내가 없을 때 남은 가족들이 이걸 보며 자신을 기억해 줬으면 해서 만들어 올리게 됐다고 하셨다. 그리고 본인이 수강한 유튜브 교육장 정보도 내게 알려주셨다. 다음 주는 튀르키예 가족여행을 가서 오늘이 수업 마지막 날이라며 인사도 하셨다. 내 기준으로 속된 잣대에 맞춰 멋대로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어르신의 가족을 향한 마음에 내 마음도 따듯해졌다. 아마 여행지에서 가족 영상을 맘껏 찍으시며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리셨겠지. 나는 생각했다. 


‘머리는 새하얗지만 저분들의 마음은 새파랗겠구나‘



재취업을 위해 이것저것 배우기 시작했지만, 수업을 듣고 배우는 자체가 좋았다. 나는 사교육에 최적화된 인간이었다. 그 후 꽤 규모가 크고, 평소에는 만나보지 못할 만한 강사님들이 수업을 하는 교육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나의 첫 교육장이었던 정보화교실 컴퓨터 수업은 매달 적어도 하나씩은 수강 신청을 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배우고픈 열정이 가득한 수강생들이 자식뻘 되는 강사님께 질문을 하며 컴퓨터를 배우고 있다. 이 달의 짝꿍인 멋쟁이 어르신은 파워포인트를 배우기엔 기초가 부족해 보였다. 타자를 끝까지 치시는 게 다행으로 보였다. Ctrl+D를 눌러 도형을 복사하라고 하자, 한 손으로 얼마나 힘주어 누르셨는지 복제된 도형이 화면 가득 생성됐다. "왼손으로 Ctrl키를 누르시고, 오른손으로 Z를 살짝 눌러보세요" 하지만 역시나 힘주어 꾹... 본인은 집에서 유튜브 영상까지 보며 공부해 왔는데 '나 참 못한다'며 멋쩍어하시길래 "혹시 피아노 칠 줄 아시면 왼손으로 특수키를 누른 채, 오른손으로는 스타카토 친다 생각하시고 가볍게 탁! 탁! 눌러보세요"라고 알려드렸다. 실전이 중요하니, 집에 가시면 Ctrl+D와 Ctrl+Z를  반복해서 연습해 보시라고 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 강사님이 캡처 단축키를 복습해 주셨다. 구글에서 이미지를 찾은 후, '윈도우 키+Shift +S'(캡처)를 눌러 원하는 영역을 드래그하고 파워포인트 화면에 Ctrl+V로 붙여 넣기였다. 도와드려야겠네.. 하며 짝꿍의 화면을 봤는데, 느리지만 정확히 왼손으로 윈도우 키와 Shift키를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S를 눌러 파워포인트에 Ctrl+V까지해서 붙여 넣고 계셨다. "와~ 잘하시네요! 집에서 공부하셨나 봐요?" 어르신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웃으셨다. 앞에 놓인 A4용지를 보니, 지난주에 내가 알려드렸던 멘트를 정자로 써 놓으신 게 보였다. '윈도키+Shift+S=캡처(캡처하는 동시에 복사도 됨), Ctrl+V로 붙여 넣기만 하면 됨.' 선생님이 다른 교육생들을 하나씩 봐주러 다니시는 동안, 우리는 엄청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 아직은 기본기가 서툰 짝꿍에게 말씀드렸다.  


“컴퓨터랑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컴퓨터는 말은 못 하니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요. 커서가 깜빡거리면 '난 글씨를 쓸 준비가 됐어'라는 뜻이고, 화살표 모양이 되면 '크기를 줄이거나 늘릴 준비가 됐어'라는 뜻이고, 이렇게 십자가 모양이 되면 '옮길 준비가 됐어'라는 뜻이에요. 화면을 보면서 컴퓨터랑 대화하듯 작업하시면 돼요"


다음에 이 수업을 한 번 더 수강하시면 우등생이 되실 거란 말과 함께 수업을 마무리했다. 가시면서도 본인 때문에 번거롭게 해서 어쩌냐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미안해하셨다. 사실, 배움의 끝은 가르치기이다. 상대방이 질문했을 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나는 제대로 배운 것이다. 이 점에서 오히려 내가 짝꿍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여전히, 나는 부족하고 배울 것투성이다. 내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일공백의 빈칸을 '배움'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이렇게 배운다고 해서 내가 취업을 하거나 돈을 벌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배움 자체가 즐겁고, 같은 과정을 함께 해나가는 동기들이 있어 힘을 얻는다. 고마운 마음을 알게 해 준 나의 ‘하얀 머리 동기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작가의 이전글 마주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