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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y 12. 2020

무너져 내리다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선

이소노미아 출판사가 1년 넘는 오랜 준비 끝에,

<무너져 내리다: 피츠제럴드 단편선>을 펴냈습니다.



책소개


이 책은 1936년 에스콰이어 지에 연재했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The Crack-Up>를 표제작으로 6편의 단편소설을 더해서 하나로 묶은 작품집입니다. 피츠제럴드의 지적인 면모와 탁월한 문체를 영어가 아닌 우리말로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보기 드문 번역이지요. 글쓰기를 좋아하는 독자께서 이 피츠제럴드 단편선을 본받아 문장연습을 하신다면 틀림없이 큰 도움을 얻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쓰기에 필요한 모든 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맨 앞에 있는 <무너져 내리다>에서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겪었던 좌절을 이야기합니다. 피츠제럴드는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아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즐거운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즐거운지를 말할 때와는 달리 인생을 겨우 살아가는 사람이 어째서 힘겨운지를 말할 때에는 이렇듯 모든 문장의 관절이 꺾이고 맙니다.


사후 미국을 대표하는 대문호가 된 피츠제럴드의 절망 이야기 이후에 여섯 편의 단편소설이 이어집니다. <머리와 어깨>, <얼음궁전>,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는 피츠제럴드 첫 번째 단편집 <말괄량이와 철학자들>에 수록된 초기 단편입니다. 젊은 피츠제럴드가 얼마나 지적이며 얼마나 뛰어난 작가인지 문장으로 보여줍니다. <겨울 꿈>은 결과가 다른 위대한 개츠비라는 인상을 주는 단편이지요.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다시 찾은 바빌론>과 <잃어버린 10년>은 1930년대 고통스러워 하는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단편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라며,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카드뉴스


코디정과 마담쿠의 편집여담


이 책을 함께 기획하고 편집한 두 편집자 코디정과 마담쿠는 독자를 위해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뒷이야기와 책과 저자를 둘러싼 느낌과 분석을 가볍게 전합니다.


마담쿠: 피츠제럴드입니다. 이 ‘복잡한’ 남자를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고전 같지 않은 이 고전에 대해 어떤 대화를 하는 게 좋을까요?


코디정: 술이 필요하겠지요. 알코올 냄새도 좀 풍겨야 겠고요.


마담쿠: (웃음)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기는 텍스트가 세 편이 있네요.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와 <다시 찾은 바빌론>, 그리고 <잃어버린 10년>까지요. 만약 첫번째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에서 알코올 냄새를 느꼈다면, 이미 천외의 후각을 지닌 독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찾은 바빌론>과 <잃어버린 10년>은 알코올이 증발하고 남은 자리의, 어떤 흔적 같아요.


코디정: 맞아요. 스콧 피츠제럴드는 ‘알콜릭’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미국에서는 알코올 중독 사례로 <피츠제럴드 사례>가 자주 언급되기도 하고, 그 자신이 중독으로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작가이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술을 들이붓는 남초적인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한때 절친이었던 헤밍웨이에 비해서는 어딘가 매우 ‘연약한’ 느낌입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조사에서도 그렇고, 남겨진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도 그렇고, 작품의 느낌도 그렇고요.


마담쿠: 절친이요? 헤밍웨이가 피츠제럴드에 대해 풍자한 걸 보면 … 대놓고 글로 밝히기는 어렵지만 얼마나 끔찍하게 풍자했는데요. 읽는 사람으로선 웃기지만 당사자는 어휴…


코디정: (웃음) 그럼 ‘절친’ 취소할까요?


마담쿠: 말이 그렇다는 거에요.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때 절친이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사실 맨처음 <무너져 내리다>를 읽었을 때, 과연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을 갖추긴 한 걸까 강한 의구심이 들었어요. 게다가 매우 당혹스러웠어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핵심을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빙빙 돌리면서 아픈 고백인지 변명인지 헷갈리는 얘기들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거예요.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나서야 그의 마음을 조금 느낄 수 있었는데요. 사실 거기까지 가는 데에도 적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편집자로서 이 텍스트는 큰 걱정거리예요. 독자가 과연 인내심을 갖고 <무너져 내리다>를 읽을 수 있을까? 피츠제럴드의 진심이 독자에게 잘 전해질 수 있을까?


코디정: 저도 그런 생각이었어요. 조금이나마 저자의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저자의 마음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조사 하나까지 신경쓰면서 편집했습니다. 편집자의 역할이 저자의 진심과 번역가의 기예를 잘 전하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무너져 내리다> 편집이 상당히 도전적인 작업이었지요.


마담쿠: 그런데 어째서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복잡하고 산만하게 자기 표현을 했을까요?


코디정: 절망을 대놓고 표현한다는 건 어려운 법이니까요. 게다가 자아와 책임감이 강한 사람에게 더욱 힘든 일이겠지요.


마담쿠: 책임감이요?


코디정: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요. 피츠제럴드에게는 평생 돈이 필요했어요. 그 돈의 상당수는 부인의 생활과 건강에 쓰였고 나머지는 딸의 교육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쉴 수가 없었어요. 작가가 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것이니까 계속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고요. 그 심정을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담쿠: 음… 1920대 ‘재즈시대’의 최고작가였던 피츠제럴드가 세계대공항 이후 1930년대에는 ‘생계형 작가’로 전락했다고,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코디정: ‘생계형 작가’라…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31년, 피츠제럴드가 한 해동안 벌어들인 돈은 현재 화폐가치로 거의 7억 원에 달했어요. 문제는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거였어요. 사정이 어려웠던 1936년에도 그의 수입은 대략 2억 원 정도였고 매년 3억 원 이상은 벌었습니다. 하지만 경제는 수입보다는 지출에 의해 결정되곤 하잖아요? 그의 수입만으로는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관 딸과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거예요. 자존심이 강해서 가족에게 근검절약을 권하지는 않았을 거고요.


마담쿠: ‘흙수저’가 ‘금수저’와 결혼한 대가를 지불하는 격이었겠네요. 평생에 걸쳐서.


코디정: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마담쿠: <무너져 내리다>는 1936년, <에스콰이어> 지에 2월부터 4월까지 3회에 걸쳐 연재한 글이었어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첫 번째 글에서는 두 가지 충격을 말하고, 두 번째 글에서는 살아온 인생을 얘기하면서 좌절에 대해 말했지요. 그리고 마지막 글은 절망에 대한 고백이었고요. 하지만 첫 번째 글에 등장한 두 가지 충격이 무엇인지, 정확한 실체를 말하지는 않았어요. 하나는 외부에서 오는 충격이고, 또 하나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충격이라고만 했지요.


코디정: 외부 충격은 알코올 중독에 대한 임상적인 경고였을 겁니다. 그러다가는 죽을 수 있으므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중대한 선고’를 했고, 피츠제럴드는 자기가 그럴 상황이 아니라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 쯤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 혼자 요양한 얘기가 이어지고요.


마담쿠: 그렇다면 피츠제럴드를 무너뜨린 내부 충격은 뭘까요?


코디정: 작가로서의 정신적인 좌절이라고 생각해요. 피츠제럴드는 영문학에서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서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군가 한물 간 작가라거나 이제는 끝난 작가라고 비판하지 않았을까 싶고, 그런 비판을 이겨내기에는 피츠제럴드의 자아가 너무 쇠약해져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의 마지막 역작인 <밤은 부드러워>의 저조한 실적에 ‘2년 동안 있지 않은 재능을 끌어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활력을 잃은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자료를 기반으로 했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해석이에요.


마담쿠: 좋아요. 그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우린 학자나 탐정도 아니고, 사실 편집자의 탈을 썼지만 피츠제럴드의 독자에 불과하니까요. 누구나 독자라면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그 시대와 상황을 상상해보지 않을까요? 자료를 기반으로 좀 더 사실에 가까운 상상을 하길 바라면서요. 그런 상상으로 계속 가 볼게요. 두 번째 글은 더 어려워요. 대체로 연재 글에서 1부가 어려우면 그 어려움을 2부가 풀어주곤 하던데, <무너져 내리다>는 2부가 더 헷갈려요. 도대체 피츠제럴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리더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이 정말 고통스럽고 참담’하다는 이야기와 ‘돈이 없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인 사랑’, ‘부자를 혐오하는 동시에 그들을 모방하기 위해 기동성과 품격을 갖추려고 기를 쓰고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와,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나라는 존재를 잃어버린 이야기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호하단 말이에요. 이 남자, 왜 이래요?


코디정: 절망에 빠진 사람은 정신적으로 왜소해지거든요. 슬프게도 저는 이해합니다. 공감이 가요.


마담쿠: 공감이요? 경험에 기반한 건가요?


코디정: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동종의 ‘남자 속물’로서 어쩐지 알 것 같아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 그 확신을 어떻게든 증명해 내고 싶었던 욕망이 피츠제럴드에게 강하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이 그의 자아이자 이상이었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게 다른 결과를 보여줬어요. 어두컴컴한 표정으로 말했던 거죠. 이제 그만 포기하고, 인정하라고요. 그런데 피츠제럴드의 자아는 그걸 인정했어요 ‘나는 어느 누구도 절대 자발적으로는 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그건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생각이란 걸 거의 해보지 않은 놈이며, 남을 부러워하고, 남에게 의존해 왔으며, 정치적인 양심조차 없는 놈이라고 고백하면서, 쓸쓸하게 이렇게 되뇝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큰 집에 혼자 남겨진 작은 소년과 같은 느낌’이라고요.


마담쿠: (진지) 그 얘기를 들으니 왠지 신분에 맞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부인을 싫어했다고 하잖아요. 그의 재능을 갉아먹는다고요. 피츠제럴드는 유성영화의 등장이 가장 잘 나가는 소설가들마저도 낡아빠지게 만든다며 사무치는 모욕감을 고백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말련에 헐리우드에서 일하지 않나요? 그것도 돈 때문이었을까요?


코디정: 그런 것 같아요. 헐리우드 MGM 사에서 일했고 연봉도 매우 높았거든요. 나중에 해고되고 말았지만요. <무너져 내리다>의 세 번째 파트로 이어지는 거죠. 절망 다음에 오는 허무. 이제 꿈과 이상을 잃고 고물로 전락한 작가가 되었으므로, 인생은 결코 다시는 기쁘지 않겠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아야 했어요.


마담쿠: 피츠제럴드는 시나리오 작가로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어요. 소설과 달리 사후 특별히 남긴 족적도 없고요.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는 어쩐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코디정: 3부의 글 안에는 이 책의 한 줄짜리 권두 메시지가 있어요. <한때 내게 심장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이 내가 확신하는 전부였습니다.> 그 심장이 무엇이었을까요? 3부를 읽으면서 ‘아, 이 사람 영문학의 대문호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던 거였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 이 사람 평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어요. 절망과 허무가 이어지면서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고 선언했어요. 모든 걸 다…


마담쿠: 솔직히, 그리고 냉정히 말하면 <무너져 내리다>는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피츠제럴드가 이 글을 발표한 1936년 봄에도 당시 독자들로부터 매우 큰 비난을 받았다고 해요. 이 글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그걸 모르겠으니까요. 물론 사후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피츠제럴드의 고난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겠지만… 3부로 이어지는 글을 통해 독자가 알 수 있는 건 과연 뭘까요? 무너진 작가정신? 아픔? 절망? 허무?


코디정: 당사자인 피츠제럴드는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위로를 받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나름의 교훈을 얻었어요. 생각해 보면 절망은 흔하잖아요. 물질문명이 놀랍게 발전한 시대이지만 이 시대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지금도 아파하고 절망하고 있잖아요. 한 시대의 절망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절망을 이해하는 데 <무너져 내리다>는 제게 큰 가르침을 줬어요.


마담쿠: 그게 뭐죠?


코디정: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활력을 분양하고 빌려줄 수 없다는 점이요. 당연한 소리일지도 모릅니다.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내용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이 텍스트로 내게 왔을 때 무릎을 쳤다고나 할까요? 그 한 줄이 <무너져 내리다>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줬어요. 그리고 그/그녀의 자아가 붕괴된 그 시발점에 관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도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야겠다는 점.


마담쿠: <무너져 내리다>를 무사히(?) 이해하셨다면 나머지 소설은 재미있게 느껴지셨겠네요.


코디정: 그럼요. (웃음)


마담쿠: 저는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가 좋았어요. 주인공인 ‘버니스’와 사촌 ‘마저리 하비’가 서로 대립하며 뚜렷한 캐릭터로 살아 있다고 할까요? 남자 작가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심리 묘사를 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이질감이 없어요. 두 젊은 여성의 머리카락이 단발로 잘리는 사건에서 서로 다른 긴장감으로 표현되는 것도 재미있어요. “흥, 이기적인 것들은 머리 가죽을 벗겨버려야 해!”라는 버니스의 복수도 통쾌하고요.


코디정: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는 읽을 때마다 조금씩 느낌이 달라져요. 어떨 때에는 공격적인 마저리보다는 순수한 버니스에게 마음이 갔다가 또 어떨 때에는 버니스의 속물 같은 여성성보다는 자유분방한 마저리의 생각에 공감이 가더라고요. 마저리의 대사를 읽어보면 하나같이 맞는 이야기예요. 이 여자는 책에서 얼른 나와 21세기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마담쿠:이 책에는 마저리가 한 명 더 나오죠?


코디정: 네. <얼음궁전>에서 ‘마저리 리’라는 이름의 묘비명으로, 아주 쓸쓸하게요.


마담쿠: <얼음궁전>도 화자가 여성입니다. 남부 조지아 출신의 ‘샐리 캐롤 하퍼.’ 샐리 캐롤도 당당한 여성이에요. “저들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쓸모가 없었겠지. 이렇게 보고 있자니 점점 더 왜소해 보여. 저들은 우아하게 포장된 가정부일 뿐이고 남자들이 모두의 중심에 있잖아.”라고 생각할 정도의 여성입니다. <겨울 꿈>의 ‘주디 존스’는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마음껏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물이고요. <머리와 어깨>의 ‘마샤 메도우’는 스스로의 총명함과 기묘한 엇박자로 어깨에서 머리로 승진한 입지전적 인물이고요. 피츠제럴드에게 매력적인 여성이란 이런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디정: 어떤?


마담쿠: 마저리 하비의 대사가 적당하겠네요. ‘나처럼 진정으로 즐기면서 사는 여자.’


코디정: (웃음) 이거 재미있네. 그러면 저도 마저리 하비가 활약하는 소설에서 문장을 하나 뽑겠습니다. 스콧 피츠제럴드? ‘지루한 여자는 참을 수가 없다.’


마담쿠: 그럼 저는 <겨울 꿈>에 있는 문장으로, ‘그는 눈부신 것 그 자체를 원했다.’ (웃음) <겨울 꿈>의 경우에는 뭐랄까 결말만 다른 <위대한 개츠비>같았어요.


코디정: (웃음) <겨울 꿈>이 단편으로 먼저 쓰였거든요. 쓰고 보니 ‘이거, 괜찮네’ 싶어 나중에 장편을 쓰지 앟았을까요?


마담쿠: ‘덱스터 그린’은 ‘제이 개츠비’로, ‘주디 존스’를 ‘데이지 뷰캐넌’으로요?


코디정: 네. 어쩐지 <겨울 꿈>을 읽으면서 나미가 부른 ‘슬픈 인연’이라는 노래가 생각났어요. 특히 주디 존스가 다른 여자와 약혼한 덱스터에게 자기 말고 다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며 다시 유혹하는 장면에서요.


마담쿠: 저도 그 노래 좋아하는데… 갑자기 피츠제럴드가 한국인처럼 느껴지네요. (웃음) 이번에 피츠제럴드 앤솔로지로 <무너져 내리다>를 엮으면서 1편의 에세이와 6편의 단편소설을 골랐잖아요? 기준이랄지 기획 의도랄지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요.


코디정: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의 기획 의도에 따라 독자에게 일종의 입장권을 선물하는 것이었죠. 작가가 쓴 작품뿐만 아니라 그 작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독자가 함께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입장권이 생기고, 그 입장권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로 마음껏 들어가는 거예요.


마담쿠: <무너져 내리다>는 피츠제럴드라는 작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겠지요. 나머지 6편의 소설은 어땠을까요? 백 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왜 이 여섯 편이었을까요?


코디정: 이 여섯 편의 단편(뭐, 어떤 건 중편이라고 해도 되는 분량입니다만)이 피츠제럴드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정도면 좋지 않을까라는 감각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머리와 어깨>, <얼음궁전>,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는 모두 피츠제럴드의 1920년 첫 번째 단편집 <말괄량이와 철학자들Flappers and Philosophers>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초기 피츠제럴드의 지적인 재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 1922년에 쓴 <겨울 꿈>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네 편은 피츠제럴드의 머릿속 기획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1931년 작 <다시 찾은 바빌론>, 1939년 <잃어버린 10년>은 그런 게 아니에요. 자기의 체험에 기반한 자전적인 소설 같은 느낌이거든요. 대단히 다채로운 앤솔로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한 소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마담쿠: <머리와 어깨>에 대해서 우리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요. 사실 이 작품을 표제작으로 검토하기도 했었어요. 마지막 남자 주인공의 지질한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뭐야 이거?’라는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만…


코디정: (웃음) <머리와 어깨>는 문장가로서 피츠제럴드 자신이 얼마나 탐미적인 문장을 사용할 수 있는 재능이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도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마담쿠: 그 후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요.


코디정: 네. 먼저 두 개의 의자가 나옵니다. 호레이스가 앉은 의자는 ‘버클리’였고, 마샤 메도우가 앉은 의자는 ‘흄’입니다. 호레이스와 마샤 메도우의 관계는 이 두 개의 의자에서 정해져요. 버클리와 흄은 둘 다 18세기의 대철학자예요. 이 사람들이 어떤 철학자인지가 중요해요. 소설에서도 여러 번 나옵니다. 버클리에게 존재는 감각의 다발입니다. 그 존재가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존재를 지각하는 감각에 의해 존재가 결정됩니다. 감각이 달라지면 존재가 변화하겠지요. 버클리에게 이 세상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흄은 버클리보다 더 급진적인 생각을 내놓습니다. 감각이나 관념조차 회의합니다. 흄에게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지식을 부정하는 흄의 철학은 후대 철학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요. 그 흄에 마샤 메도우가 앉았습니다.


마담쿠: 완전 철학 이야기잖아요?


코디정: (웃음) <머리와 어깨>가 수록된 피츠제럴드의 단편집 제목이 <말괄량이와 철학자들>이랍니다.


마담쿠: 계속해 봐요.


코디정: 버클리라는 관념론 의자에 앉아 있던 호레이스 타복스의 관심사는 리얼리즘입니다. 이게 철학적으로 어울릴 수가 없는 거예요. 호레이스가 지닌 ‘엇박자’이지요. 호레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에서 내 주된 관심사는 현대 철학이고, 난 베르그송의 이론이 가미된 안톤 로리에 학파의 리얼리스트야.” 그러면서 자신의 엇박자를 ‘뉴리얼리즘’으로 치장하고 있어요. 하지만 관념의 세계 안에서 오락가락하지요. 장미꽃 향기를 내뿜고 있는 우리의 흄을 흠모하고 경배하면서요. 생기발랄하고 독창적인 문장과 유머를 쏟아내는 마샤 메도우는 그런 정신적인 엇박자가 없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이미 뉴리얼리트이거든요. 그녀는 ‘산드라 피브스의 엇박자’라는 책을 저술하고 머리가 됩니다. 그리고 ‘불멸의 문학 같지 않은 문학’을 저술하기로 하잖아요? 호레이스의 엇박자는 항상 버클리가 들은 노크 소리에 멈춰 있고요. 결말에서 그 노크 소리가 다른 감각으로 바뀝니다. 감각과 관념이 바뀌었으므로 세상이 다시 바뀌었고요. 어쨌든 <머리와 어깨>는 피츠제럴드가 자신이 얼마나 지성이 있는지를 어필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마담쿠: 사실 피츠제럴드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다들 멋지고, 젊고, 활기차며, 이미 성공을 했거나 성공을 지향하잖아요? 다분히 속물적이고요. 그리고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피츠제럴드의 깊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가 상당히 많은 지식을 지닌 작가라는 점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군요.


코디정: 네.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장점은 그가 지닌 배경 지식이 아니라 문장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피츠제럴드의 문장이 좋아요. 그의 문장은 글쓰기의 교본 같아요. 비유, 묘사, 진술의 모든 수사적인 기법은 말할 것도 없고 적절한 유머와 재치와 애드립이 피츠제럴드의 문장 안에 다 들어있거든요. 요즘 글쓰기 훈련을 하고 있는 딸에게 이 책이 좋은 교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마담쿠: (웃음) 그 말씀은 이 책의 번역이 좋다는 칭찬으로도 들리네요. 이 책의 번역가는 김보영 선생님입니다. 피츠제럴드를 가장 피츠제럴드 답게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셔서 힘써 주셨어요. 번역가 선생님의 말씀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번역가 김보영: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로 잘 알려진 작가입니다. 그러나 그 한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는 다작의 작가였습니다. 다섯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단편소설, 에세이, 시나리오 등을 남겼습니다. 첫 소설 <낙원의 이편>으로 단숨에 부와 명성을 거머쥔 그는 1920년대 당시 잘 나가는 작가 대열에 일찍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전후 물질적 풍요와 향락이 팽배했던 그 ‘재즈 시대’가 그에게도 활짝 열린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했고, 남부러울 것 없는 명성도 얻었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야심차게 발표한 작품들의 연이은 실패와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거기에 대공황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그는 점점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가 탄생했습니다. 화려한 파티의 시대가 끝난 뒤 찾아온 무질서와 허무, 폐허가 된 삶의 파편들이 그를 피폐화시켰고 그 아픔과 상처가 오롯이 그 작품에 담겼습니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개인적, 시대적 삶을 유추해보는 것은 문학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입니다. 작가는 종종 등장인물의 1인칭 화법을 통해, 혹은 3인칭 시점의 전지적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들은 하나하나가 작은 분신처럼 그의 다양한 면모와 그만의 독특한 감성을 담고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과 미숙한 결정으로 인해 재기 불능이 되어버린 천재의 이야기(<머리와 어깨>),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성공한 듯 보이는 인생에 스민 강렬한 고독과 회한(<겨울꿈>), 낭만적 사랑의 이면에 감추어진 미국 사회의 집단적 환상(<얼음궁전>), 방탕한 생활 끝에 찾아오는 깊은 통한과 쓰디쓴 대가(<다시 찾은 바빌론>과 <잃어버린 10년>). 이야기는 술술 막힘없이 흥미롭게 전개되지만 그 내용들은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삶 속에 면면히 흐르는 낭만적인 애상과 허무, 비극성 때문인 듯합니다. <겨울꿈>의 작품명이 암시하듯 그의 작품들 속에는 눈부신 화려함과 암울함이 공존합니다. ‘화려한 것’을 갈망하고 ‘최고의 것을 향해 손을 뻗지만’ 결국은 꿈의 환영 속에서 상실과 허탈감만 안게 되는 인물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입니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그의 작품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의 소중한 조우를 허락해주신 이소노미아 식구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번역가 김보영: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한때 잡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지만 가장 행복한 건 글을 만지고 책을 벗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개츠비>  <문을 여는 첫 번째 사람> <사람을 읽어라> <찰스 다윈>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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