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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Aug 27. 2020

소득이 아니라 지출

정부의 역할에 관해서;;;

오랜만에,

그냥 한번 써봤어요.


만인은 기본권으로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국민 개인의 그런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국민의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것이 문제인데….


행복론자들인 공리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행복이란 즐거움(쾌락: Pleasure)이 늘고 고통이 줄어든 상태를 말한다. 거꾸로 불행이란 고통이 늘고 즐거움이 줄어든 상태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정신적인 건가? 아니, 물질적인 행복? 즐거움과 고통이 사람마다 같을까? 이런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도무지 정답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논점을 바꾸자.


정부의 노력이란 결국 ‘재정’을 쓰는 일인데, 결국 돈에 관한 것이니까, ‘돈’으로 국민의 행복을 가늠하고 측량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정부의 정책 이야기다.


돈은 두 가지다.
나한테 들어오는 것과 내가 지불하는 것.
즉, 소득과 지출이다.
요컨대 돈 문제라고 한다면,
소득의 문제와 지출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보수주의자들이나,

공공복리와 복지를 찬미하는 진보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돈 문제 = 소득의 문제>로 이해한다.


소득이 늘면 행복해진다라거나, 소득이 줄면 불행해진다는 기본 관념이 있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하에서 이야기하는 타율지출 문제가 있는 한, 소득중심 성장이라거나 기본소득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고, 연봉 3,000만 원인 노동자가 6,000만 원으로 100% 임금인상이 되었다면 행복해지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가?


물론 연봉 3,000만 원 노동자가 5억 원의 소득이 생기면 행복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소득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기도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 부담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출은 아래와 같이 구성된다. 소득이 ‘타율 지출’을 초과할 때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이것이 사람들이 부동산을 애정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연봉으로는 ‘타율 지출’을 넘기 힘들다. 연봉 1억도 힘들어하는 지출이 있다.


지출 = 자율 지출 + 타율 지출.


내가 지금껏 경험하고 공부하고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오히려 <돈 문제 = 지출의 문제>이다. 돈을 지출할 수 있고, 그래서 소비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으면 행복해진다. 그걸 못하면 고통스럽다. 소득이 늘어도 지출이 더 크게 늘면 고통은 지속된다.


그런데 지출은 자기 소득 범위 내에서 스스로 줄일 수 있는 지출(자율 지출, 외식하고 여행하고 여가를 즐기는 수준의 지출)과 자기가 정할 수 없는 지출(타율 지출)이 있다. 자율 지출은 욕망의 문제이다. 그러나 타율 지출은 다르다. 그 크기가 소득 수준을 넘으면 욕망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체념과 절망과 허무가 발생한다. 이게 유래를 찾기 어려운 대한민국 출산율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지출, 즉 자기 소득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타율 지출이 국민을 불행하게 만든다.


소득은 기본적으로 자율적이다. 내가 노동해서 돈을 번다. 아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가 시스템이 주는 타율적으로 주는 소득(기본소득이든 구제적인 복지소득이든 무엇이든)의 크기가 자율적인 소득보다 크기는 어렵다. 그런데 지출은 소득과 달리, 타율 지출이 자율 지출을 초월해 버린다. 그때 사람들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적인 박탈감도 나타난다.


몇몇 사람들이 찬양하는 세금은 타율적인 지출이다. 현대 국가가 그걸 잘 안다. 그래서 세금이 초래하는 고통의 수준을 잘 고려해서 과세한다. 그것이 바로 누진세의 정의다. 세금은 소득 수준을 초월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큰 문제가 아니다. 세금으로 줄어든 가처분소득에서 세금보다 더 큰 타율 지출이 있다면? 물론 있다. 우선 빚이 있다. 원금 상환하라고 하면 비명을 지를 사람이 많다. 그리고 부동산이 있다. 대체로 채무는 부동산 때문에 발생한다. 교육 지출도 있으나, 그것은 더 높은 교육이 더 안정되고 더 높은 소득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득주의가 불러온 환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출이다.


자율 지출의 경우 줄면 불행해지고
늘면 행복해진다.
거꾸로 타율 지출이 줄어들면 행복해지고
늘어나면 불행해진다.


결론은 이렇다. 세금을 제외한 국민의 타율 지출을 줄여줘야 한다.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빚을 지지 않아도 살만한 집이 있는 세상”, 이것이다. 집걱정만 없다면야 임대여도 좋다. 정부가 <빚>과 <집>을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들에게 <집빚>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구조를 혁신하는 일이다.


물론, 어렵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정부는 어쨌든 국민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하니까.


대기업 임직원의 소득에 맞춰 중소기업 임직원의 소득을 강제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중소기업 임직원의 ‘지출’을 줄여준다. 중소기업향 보편적 임대주택을 공급하고, 공공 부동산의 매각을 멈추고 리모델링하여 주거지로 변경해서 주거 지출을 낮춘다.


수도권에 인구가 많아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수도권에 인구가 밀집된 것은 교육 때문이요, 일자리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 지역에서 더 좋은 소비가 일어나도록 지역경제를 혁신해야 한다. 지방정부에 돈이라는 강력한 무기(법인세 자주권이라도)을 줘서 스스로 혁신하도록 하고, 광역권마다 교육중심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집빚>이 줄면 지출이 늘어난다.


그때의 지출은 소득 수준에서 생기는 자율 지출이다.

자율 지출이 늘면 국민은 행복해한다.

내수 경제도 좋아진다.


그냥 한번 써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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