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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y 23. 2022

매일 한 문장 4

당신은 숲, 나는 나뭇잎

딸과 함께 매일 한 문장씩 쓰고 있다. 문장 훈련이며 생각 연습이다. 아빠의 문장만 여기 옮긴다.


2022-05-18

10. 천천히 하세요.


내가 일하는 회사는 호텔 건물이다. 3층과 4층은 오피스동이며, 5층부터 18층은 객실이다. 회사는 303호에 세들어 있고, 나는 이곳에서 십 년째 일한다. 호텔 옥상에는 수영장도 있고 예쁜 옥상 정원이 있다. 나는 매일 몇 번이고 옥상에 올라가서 나무 아래 앉아 잠시 녹색에 머물며 서울 구경도 한다. 엘리베이터 중에서 딱 한 개만 옥상에 오를 수 있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호텔 관리자들, 청소요원들, 가끔 정원사들... 특히 룸메이드들을 자주 만난다. 룸메이드들과 대화해 본 적은 없다.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얼굴 인상을 보면서, 아, 이분들은 몽골인, 이분은 필리핀인, 이쪽은 일본인이구나, 라고 혼자 생각한다. 


룸메이드들은 전기청소기와 각종 용품이 차곡차곡 담긴 청소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있으면 절로 마음이 급해진다. 그때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서 문을 잡아준다. "천천히 하세요." 내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친절함의 표현이다. 십 년 동안 나는 이들을 응원해 왔다. 서로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안다. 천천히 하세요 아저씨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2022-05-19

11. 볼케이노 같은 에너지


목요일 저녁 훌륭한 요리를 내놓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 앉아 '바이크 케이' 선생과 와인을 마셨다. 이분은 매우 별난 분이다. '50대의 젊은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십 만에 한 명 볼까 말까한 유별난 패션으로 도시를 활보한다. 수십 년 간 바이크를 타고 다닌 독신 남성이며, 하여튼 예사롭지 않다. 뭔가 전문적인 일을 하는데 솔직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동안 몇 번이고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 봤을 때, 브랜드 마케팅을 하는데, 우리가 아는 그런 브랜드 마케팅이 아닌, 소수의 재산가를 상대로 은밀하게 맞춤 컨설팅을 하는 것 같다. 고도의 경험지식으로 일하는 것 같아서 그 세계를 묻지 않는다. 아주 별난 사람이다. 그냥 대화를 한다. 사람과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바이크 케이가 내게 말한다. 내가 별난 사람이라고. 별난 사람이 내게 별난 사람이라고 하니까 재미있기는 해도 그 말을 들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좀 난처하다. 게다가 그는 내게 언제나 극존칭의 어법을 구사하는 관계로 어색하기도 하다. 그가 말하기를, 자신은 여러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나눠주면서 살아 왔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오히려 볼케이노 같은 에너지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세상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겠노라고 답함으로써 숙제가 하나 생겼다. 집에 돌아와 딸에게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말하니, 자신도 그렇다고, 친구들이 자기에게 볼케이노 같은 에너지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노라고 답한다. 그래, 너는 내 딸이다.



2022-05-20

12. 당신은 숲, 나는 나뭇잎


고객 L이 내게 자문계약을 제안했다. 내가 성실하게 자문에 응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계약이다. 선의가 가득 담긴 계약이었다. 계약서 초안에는 당사자가 '갑'과 '을'로 표현되어 있었다. 계약서 초안을 검토하면서 '갑'을 '숲'으로, '을'을 '나뭇잎'으로 바꿨다. L이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큰 숲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그 숲에 있는 나무에서 자라나 떨어지는 나뭇잎이 되어 좋은 거름이 돼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담고 싶었다. 이런 것이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인생이다. 수정한 계약서를 보내니 L이 좋아했다. 계약서가 최종적으로 어떻게 작성될지는 모른다. 그냥 평범하게 '갑'과 '을'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약은 마음과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한 만큼 신뢰하면 일이 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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