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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y 24. 2022

매일 한 문장 5

사슴벌레가 죽었다.

딸아빠 노트에 매일 한 문장씩 쓰기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났다.

또 사흘 분의 문장을 여기 옮긴다.



2022-05-21

13. 사소한 응원이 나를 이끌 것이다.


매주 토요일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1에 있는 전미라테니스아카데미에 간다. 아들은 테니스 치러 가고 아빠는 기사 노릇이다. 아들의 테니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자동차 기름도 넣고 세차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셀프 주유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기름을 넣기 시작하자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 차가 다가 와서 세차장 옆에 비스듬히 정차한 후 창문을 연다. 생김새가 파키스탄 계통 같았다. 뒷좌석에는 히잡에 마스크를 한 여성이 있었다. 아마 부인이었을 것이다. 직원 두 명이 다가갔다. 엿듣기로는 며칠 전에 이곳에서 세차했는데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수증을 보여주는 듯했다.


흘깃 훔쳐본 남편의 표정이 하루종일 잊히지 않았다. 과하게 겸손하면서 조심스럽고 또 간절한 웃음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때 나는 이곳에서 보낸 그이의 힘든 시간을 생각했다. 가솔린을 넣으며 나는 아주 잠시나마 마음속에서 그의 가족이 되었다. 나는 모든 사연의 디아스포라를 응원한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 있는 인류와 내 속의 인류가 다르지 않으니, 내 사소한 응원이 나를 인류 사회로 이끌 것이다. 그 여정이 내 여생이 됐으면 한다.



2022-05-22

14. 사슴벌레가 죽었다.


아들이 집에서 키우던 사슴벌레가 죽었다. 3년을 아들과 함께한 곤충이었다. 슬퍼하는 아들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도 쓸쓸하니 상실감을 느낀다. 문이 닫힌 느낌이었다. 영영 이별하고 만 듯했다. 우리집에서는 이제 어린이가 사라졌다. 사라진 그곳에 아빠만큼 키가 커진 중학생이 서 있다.


아들은 초등학생 시절 내내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키우며 살았다. 항상 이들 곤충을 벗하며 동경했다. 꿀을 준비해서 참나무에 사는 사슴벌레를 잡으로 숲에 들어가자고 보채기 일쑤였다. 외할아버지에게 항상 사슴벌레 얘기를 하니 할아버지도 손자를 위해 사슴벌레를 키우기도 했다. 그런 시절이 갔다. 우리는 자꾸 뭔가를 상실하면서 나이를 먹는다.

어린 아들이 그린 사슴벌레, 이 그림을 출판사 로고로 삼았다


2022-05-23

15. 네가, 그곳에 이르렀으면 좋겠어.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될 딸에게 물었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고는 말하면서 틈만 나면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는 딸에게 아빠가 물었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목표를 향해 잘 가고 있는 것 같냐고, 만족하냐고 아니면 불만족이냐고. 딸은 불만족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됐다고 말한 후 나는 내 할일을 하고, 딸은 다시 자기 방에 들어갔다. 좀 시간이 흐른 후,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며 들어가 봤더니, 목적 없이 누워 또 휴대폰을 잡고 있네. 쑥스러웠는지 딸도 웃는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다시 대화했다. 큰소리가 오가기도 했다. 딸은 자꾸 ‘시험에 나오는 공부’ 이야기를 한다. 아빠가 말하는 공부는 시험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무용하다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나는 ‘흥미가 생기는 공부’로 답했다. 딸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 우리는 자주 다투지만 딸은 아빠보다 현명해서 의견차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건 정말 훌륭한 모습이며 이 아이의 깊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딸에게 내 생각을 전한다. 아빠로서, 친구로서.


아빠는 네가 그곳에 이르렀으면 해. 누구든 살다 보면 거기까지 가야 해. 자기가 지닌 힘이 마침내 당도하는 그 벽까지. 그곳에 이르르면 자유를 얻어. 시험에 나오는 문제만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는 그 벽에 갈 수 없어. 거기까지가 얼마나 지루한데, 그래서 일단 재미와 흥미가 필요해. 그래야 참지. 흥미가 생긴 다음에는 의지를 갖고 분발해야 해.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기까지 가고 있다는 게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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