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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y 26. 2022

매일 한 문장 6

인색하게 사느니 방탕하게 살아라.

딸아빠 노트에 매일 한 문장씩 쓰고 있다.

딸은 자주 빼먹는다. 성실함은 우선 아빠의 . 아직까지는 정성껏 쓰고 싶다.


2022-05-24

16.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말자고 하면서도...


기대하는 일은 잘 안된다. 꿈을 꾸고 애써도 대부분 실패한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이 인제는 징그럽지 않다. 익숙해졌다. 또 체념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서 설득하는 일, 이 세상에 내가 만든 성과를 내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 큰돈을 수확하는 일, 여럿 힘을 모아 크게 성공하는 일은 하나같이 어렵다. 이런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다. 지난 3월에 로마시대의 현자이신 에픽테토스 할아버지의 책, <엥케이리디온, 내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을 때>라는 책을 편집해서 세상에 내놨다. 총 53장에서 첫 번째 장의 제목이 <통제할 수 있는 일과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일과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맺는다. "만일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말자고 하면서도, 어느 사이엔가 그걸 또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내 괴로움의 온상이다. 그래서 주문을 외우듯 에픽테토스 할아버지의 문장을 되뇐다. 그러면 또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네.



2022-05-25

17.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문득 책을 만드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다. 지금껏 한 일에 부끄러움은 없다. 그런데 부끄럽다. 이토록 애쓴 수고를 원래 하던 일에나 쓸 것이지... 지금까지 뭘 한 거야? 라는 자조 섞인 질문을 하면, 좀 부끄러워진다. 정신승리를 하고 싶지는 않다. 회의감에 젖는다. 그러다가 혼잣말로 '나의 지식인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라는 문장을 내뱉었다. 어? 이건, 내가 아주 오래전에 중학생 시절에 배웠던 유치환 <생명의 서> 시구인데... 더 나아가 봤다.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여기까지 생각이 난다. 신기하네. 대견하네. 멋진데?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는 곳. 고독이 이처럼 밀접해지다니, 한편으로는 쾌적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진짜 한 번 비행기 타고 여기를 떠나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래나저래나 나는, 병든 나무는 아니다.




2022-05-26

18. 인색하게 사느니 방탕하게 살아라.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무려 24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말이다. 돈에 대한 마음가짐에서 지나친 쪽은 방탕이요, 모자란 쪽은 인색함이며, 그 가운데의 '중용'은 <돈에 대한 관대함>이고, 이 돈에 대한 관대함이 미덕이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여기까지는 특별하지 않다. 아무렴, 좋은 말씀이시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방탕하게 사는 놈은 잘만 보살피면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지만, 인색한 놈은 답이 없고 치유가 안된다는 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4권, 첫 번째 장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입장이다. 딸에게 말하고 싶다. 인색하게 사느니 방탕하게 살아라.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모가 할 짓이냐고? 이 정도의 은유는 아이들도 알아챈다. 인색한 친구보다는 방탕한 친구가 낫고, 방탕한 친구를 만나면 잘 보살필 생각을 해라, 인색한 친구를 만나면 거리를 둬라 등등...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이 생각난다. 유치원에서도, 교회 주일학교에서도, 초등학교에서도, 어디에서나, 아직 노동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툭하면 '시장놀이'를 가르쳤다. 시장놀이에 환장한 사회에서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지는 않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돈을 가르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스스로 배울 것이다. 이미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명백히 자본주의 사회니까. 나는 그저 아이들이 <돈에 대한 관대함>을 갖고 살아갔으면 하고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인색한 건 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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